배너없음
강대국에 의한 조선의 분할안과 분단 그리고 통일방안
기자 : 관리자 날짜 : 2020-01-03 (금) 18:27




조선반도의 분할안과 분단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강대국에 의해 획책된 한국의 분할안들이 여러 번 있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 첫 번째 분할안은 임진왜란(1592년-1598년) 당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반도
를 침략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더 북쪽으로 진격할 때 이미 추운 겨울이 되어 군사보급의 어려움
을 겪자 1593년 6월 28일 일본이 조선반도를 정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명나라가
개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한강 이남은 일본이, 한강 이
북은 명나라가 각각 나누어 가질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반도의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두 번째 분할안은 청나라와 일본 간에 체결된 1885년의 톈진조약(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간
의 조약)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한 일본의 의도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1894년 4월 약체 조선조 정부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4개월 후 동학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의 군대를 파견할 것을 청나라에 요청했을 때 일본은 조선조 정부가 한 번도 일본 정부
에게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대를 조선에 상륙시켰다. 1894년 7
월 22일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청·일 양국의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영국 외
상 킴벌리 경(Lord Kimberly)은 조선반도의 분할안을 청나라와 일본에 각각 제안했다. 그의 안
에 의하면 한강 이북은 청나라가 그리고 한강 이남은 일본이 각각 분할 점령하는 안이었다. 그러
나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를 거절하였다.


세 번째 분할안은 일본에 의한 38도선에서의 조선반도의 분할이다. 일본의 전권특명대사 야
마가타 아리모토 장군은 1896년 6월 9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관식에 일본 대표로
참석해서 러시아의 외상 알렉세이 로마노프와의 비밀회담에서 조선반도와 관련하여 조선을
38도선에서 분할할 것을 제안했다. 그에 의하면 38선 이북은 러시아가, 그 이남은 일본의 영
향권에 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 당시 조선에서 일본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네 번째 분할안은 러시아가 일본에 제안한 분할안이었다. 로·일 전쟁 개시 1년 전인 1903년
9월 13일 러시아 외상 로마노비치 로젠은 한반도를 39도선에서 분할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번
에는 일본이 전 조선반도를 정복할 수 있는 충분한 수단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러시아
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연합국인 미국, 영국 그리고 중국에 의해서 1943년 12월 1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공
표된 조선 독립에 관한 최초의 공식 문서가 바로 카이로선언이었다. 이 선언에서 루즈벨트 대통
령은 처칠 영국 수상과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은 “조선은 적당한 시기에 자유·독립국가가 될 것
이다”라는 그들의 결정을 내외에 공표하였다. 카이로회담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 회담 직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스탈린은 조선의 장래에
대한 카이로선언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있
었기 때문에 조선문제에 소련의 공식입장개입은 불가능하였다.
테헤란회담에서는 조선문제가 3국 정상들에 의해 간략하게 논의되었다. 1943년 11월 28일
루즈벨트는 이 회담에서 필리핀모델을 상기하면서 조선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 전에 일정 기간
의 신탁통치, 즉 일정 기간 동안 자치훈련을 받을 것을 제안했고 스탈린은 이에 대해 동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의 조선반도문제 처리에 대한 강대국들의 부적절한 계획
으로 말미암아 전후 강대국들 간의 이해의 상충이 발생하자마자 조선반도는 분단의 길로 들어
서게 되었다. 1943년 카이로선언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조선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
정했으며, 조선반도를 일본제국의 한 구성부분으로 취급하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합의한 1941년
8월의 대서양헌장은 장래 세계평화를 위한 기본계획을 구체화시키는 가운데 피침략국의 민족자
결권을 명시함으로써 망명 중인 조선반도 지도자들에게 머지 않는 장래에 조선도 독립할 수 있
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 결과 당시 중국의 임시수도 중칭에 체재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과
미국정부로부터 공식정부로서의 승인을 얻고자 노력하였으나, 임시정부의 구성원들 간의 분열
과 본국 국민과의 유대 약화 등을 이유로 정부 승인을 얻지 못했다.
아마 미국이 그의 연합국과 조선문제를 처음 공식적으로 언급하였던 것은 1943년 3얼 루즈
벨트 미 대통령과 영국 외상 엔소니 이든과의 회담이었다. 그들은 만주, 조선, 대만, 인도네시아
등에 관한 전후의 정책을 논의하는 가운데 조선은 중국, 미국 그리고 하나 또는 두 개의 기타 관
련국에 의한 신탁통치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는 제안에 합의하였다.
루즈벨트는 1943년 11월 말에 카이로에서 장제스와 처칠을 만났을 때 이러한 구상을 언급했
다. 중국은 조선의 독립의 필요성을 미국에게 역설하였는데 반해 처칠은 조선의 장래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 독립문제에 관한 한 미국의 입장을 받아들이는데 동의하였다.
연합국인 미국, 영국 그리고 중국에 의해서 1943년 12월 1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공
표된 조선독립에 관한 최초의 공식문서가 카이로선언이다. 이 선언에서 미국, 영국 그리고 중
국 정상들은 “조선은 적당한 시기에 자유·독립국가가 될 것이다”라는 그들의 결정을 내외에 공
표했다. 카이로회담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 회담 직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개최된 미
국·영국·소련정상회담에 참석했던 스탈린은 조선 장래에 대한 카이로 선언을 원칙적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문제에 소련의 공식
개입은 불가능했다. 
여하튼 카이로선언은 그 후 미국, 영국, 중국과 소련이 공식적으로 전쟁 중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국제법적 근거가 되었다.
그 후 1943년 2월 4일에 개최된 얄타회담에서도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조선의 장래에 대해 간략
하게 논의했으나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였다. 문서로는 합의사항이 없었으나 아마 구두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20년~30년간의 조선반도의 신탁통치안의 실현과 조선반도 내의 모
든 외국 군대가 영구히 조선에 주둔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항을 양해했음에 틀림없다.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이 일본에 대항하여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
에 소련에게 많은 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러일전쟁에서 상실했던 조선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권리를 회복시키
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얄타회담에서 대일전에 대한 소련의 참전약속은 장차 소련이 일본
제국과 조선반도의 장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포츠담회담에서 러시아의 대일 선전포고에 대한 결정을 위해서 미·소간의 공군
및 해군작전을 위한 조선의 일반지역에서의 작전경계선이 있어야 한다는 데 미·소 군사지도자
들의 합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혹은 소련 중 어느 군대도 가까운 시일 내에 조선에 진입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상작전을 위한 전투지역의 할당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일본이 항복
하기 전의 어떠한 정상회담이나 비밀외교에서도 조선의 장래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에 합의한
것은 없었다. 다만 조선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은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 후, 조선은 자유·독
립국가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난 전쟁 중 조선 장래에 대한 강대국 간의 확실한 합의의 결여는
역설적으로 조선의 장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는 조선반도 점령을 위한 미국의 불충분한 준비태세를 감안할 때, 소련이 전 조선반도를 접수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조선의 군사점령의 기간과 그 점령의 성격에 대해서 합의를 했었더라면, 조선의 분단은 아마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문제의 처리계획은 불행하게도 전쟁 중이 아니라 그 후에 수립되었다. 조선 임시정부의 수립과 강대국의 신탁통치 계획의 실행을 위한 계획을 수행하고 집행하는 대신에, 미국과 소련의 두 해군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한 군사경계선이었던 38도선에 도착하여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선 문제에 관해 얄타와 포츠담회담에서 부분적으로 논의가 되었지만, 미국과 소련 양국은 그러한 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어떠한 계획도 마련하지 못하였다.
1945년 5월 독일군이 항복하게 되자 연합국들은 이제 일본군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미군은 마침내 8월 6일과 8일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소련은 8월 8일 대일전에 참전하여 태평양지역의 전세는 연합국에게 결정적으로 우리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소련 적군은 만주를 거쳐 조선의 여러 도시를 공격목표로 하고 12일 북한 청진에 상륙하였다.
이에 일본은 10일 중립국 스위스를 통해 연합국에게 항복 의사를 표시하고, 15일 일본 천황 히
로히토는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접한 워싱턴은 조선반도의 군사적 점령과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긴
급한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국은 소련에 의한 조선반도의 점령을 방지하기 위하
여 북위 38도선에서 조선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소련이 조선반도의 동북부를 폭격
하고 있었을 즈음, 미군은 조선반도로부터 600마일이나 떨어진 오키나와와 1500마일 떨어진
필리핀에 있었다.
이에 전쟁성의 맥클로이(John J, Mcloy) 차관보는 8월 10일과 11일 밤에 본 스틸(CH
Bonesteel)과 러스크(Dean Rusk) 대령을 펜타곤 (그 당시 미국 전쟁성, 현재 국방성)에 불러
미국이 북상하여 항복을 받고자 하는 지역과 미군이 도착 가능한 지역과의 차이를 극소화할 수
있는 대안을 작성해 줄 것을 요구했다. 본스틸과 러스크는 조선반도의 38도선을 결정했다. 앙
자는 바로 맥클로이 차관보에게 보고되고 맥클로이 차관보는 38도선 분할 점령안을 바로 8월
 
11일에 당시 스팀슨 전쟁성 장관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스팀슨 장관은 곧바로 태평양 지역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하달 일반명령 제1호의 초안을 작성했다. 일반명령 제1호에는 조선
반도와 관련하여 38도선 이북에 있는 일본군은 소련군 사령관에게, 38도선 이남에 있는 일본군
은 미군 사령관에게 각각 항복하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트루먼(HS Truman) 대통령이
이 초안을 8월 13일 수정 없이 승인했고, 즉시 영국과 소련 및 중화민국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연합국 3개국 중 어느 나라도 이 초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8월 15일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일반명령 제 1호로 하달되었다.
이처럼 38도선에서 조선의 분할에 관한 미국의 제안은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단지 일본군
의 항복을 받고 그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어떠한 합의
형식이 없을 경우 예상되는 소련에 의한 조선반도 전체의 점령을 방지하기 위한 미국의 미봉책
이었다.
소련이 그 당시 조선반도를 점령할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반도에 대한 분할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미국과 함께 소련이 일본의 군사점령에 참여할 기회를 얻고자 하는 희망 때문
이었던 것 같다. 스탈린은 1945년 8월 15일자 트루먼의 전문을 받고 이에 대한 가부간의 답신
대신에 8월 14일자 전문에서 일본의 홋카이도를 미국과 양분할 것을 트루먼에게 제안했다. 그
러나 트루먼은 이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Nonaction). 이는 일종의 반응인 것만은 사
실이다. 미국의 원자탄 투하로 일본이 미국정책 결정자들의 예상보다 빨리 1945년 8월 15일 미
국 등 연합국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미국은 조선점령에 관하여 사실 어떠한 정치·군사적 준비
도 갖추지 못했다.
하지 미군장군의 지위 하에 제24군단 약 72.000명의 미군은 소련군이 최초로 북조선에
들어 온지 거의 한 달이 지난 9월 8일에서야 남조선에 진주하였다.하지 사령관은 미 합참본부와 연합군 총사령관으로부터 다음의 임무를 할 것을 명령받았다.


1)   일본군의 항복접수,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항복조건의 실행과 조선반도로부터 일본제
국주의자들의 제거

2)   조선의 질서 유지, 민주적 방침에 따른 효율적 정부의 수립과 통일조선의 독립기반으로써 건전한 경제의 재건

3)   조선인들 스스로 그들 국내의 제반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그들의 훈련과 자유 독립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자치능력의 향상과 그 준비그러나 미군정은 이러한 훈련을 실시하기엔 너무나 아마추어들로 엄청난 도전들을 예고하고 있었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였을 때 그곳에서는 ‘조선 인민 공화국’이라는 실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일본의 항복에서 미군의 진주까지 약 3주일 동안
조선반도의 상황은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남조선에서 반일폭동이 일어
날 경우 일본인의 안전과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 하에 조선인 지도자들에게 접근하
여 그들이 과도정부 구성 준비를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여운형은 조선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이미 1944년에 비밀리에 조직했던 조선건국동맹의 첫 공개회의를 소집했으며, 좌·우파 민족 지도자들과도 협의하였다. 그러나 좌파 여운형이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도 좌·우파 민족지도자들의 갈등과 대립으로 창건이 된 지 20여 일 만에 해체되었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에 남은 여운형을 비롯한 좌파들은 이틀 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공산당정권
수립을 기도하고 나섰다.
만약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우로 분열·대결되지 않고 좌·우파가 통일정부를 향해 모두 합심하였더라면 강대국 미·소에 커다란 압력이 되어조선반도는 남·북한으로 분단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의 통일처럼 조국통일도 성취 하였을 지도모른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 좌·우파지도자들은 4강(미·영·소·프랑스)의 점령 하에서도 모든 정파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이것을 모체로 영세중립 통일국가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 내 민족지도자들의 분열은 좌우란 그치지 않았다. 공산당 활동이 미군정에 의해불법화되자, 우파들 간의 갈등과 대결이 격화되었다. 김구를 중심한 ‘중경임시정부파’는 이승만의 분단정부 수립을 전면 반대, 격심한 내분을 빚어냈다. 심지어 단정파는 1948년 5월 10일 총선마저 보이콧하는 민족내부 분열상을 노출시키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의 주장으로 ‘대한민국’이 1945년 8월 15일 수립한 데 비해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서 김일성을 앞세운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8년 9월 9일 수립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의 분단은 완성되었다.


   

 

본사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96파크뷰타워 208호 (사)21c안보전략연구원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아 02284 / 발행인 : 박정하

정기간행물등록번호 :서울라10600 / 대표전화 : 02-6953-0041, 031-727-8105
팩스 : 02-6953-004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정하

군사저널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새소식

Copyright ⓒ군사저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