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국부(國父)’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헌신 리더십
기자 : 관리자 날짜 : 2021-11-23 (화) 16:30




‘터키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 파샤(Mustafa Kemal Atatu ‥rk, 1881~1938)가 지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조국의 현실을 보면 뭐라 말할까.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근 미국과 유럽 등 터키 주재 서방 10국 대사에 대해 사실상 추방 조치를 했다. (이틀만에 철회하긴 했지만.) 이들이 공동성 명을 통해 터키 반정부 인사 오스만 카발라의 석 방을 요구했다는 이유에서다. 에르도안은 터키 건국과 근대화의 아버지인 케 말 파샤의 개혁 이래 지켜온 정교(政敎)분리 원칙 의 세속주의도 깼다. 케말 파샤가 애써 이슬람으 로부터 어렵사리 터키를 살려냈는데 다시 과거로 복귀하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 이런 사회적 갈등과 경제 사정이 계속 나빠지면 서 에르도안 정부에 대한 터키 국민의 반감이 커 지는 모양새다. 케말 파샤는 생전에 오직 조국의 독립과 영광을 위해 몸바친 실용주의 정신으로 선린외교·사회통합 을 이끈 애국·애민의 아이콘이었다. 그랬기에 지금도 터키국민들은 그를 ’아타튀르크 (조국의 아버지)‘로 숭모하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지 내며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생을 바친 거인(巨人)에 대한 터키인들의 기림은 특별하다. 무스타파 케말이 살았던 시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격변기였다.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19세기 말 지금은 그리스 영토인 살로니카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하급 관리 집안에서 태어난 무스타파 케말 이 전성기 활약을 펼친 곳은 소아시아의 앙카라였 으며 숨진 곳은 이스탄불이었다. 생애 자체가 터키 의 국가 운명과 함께 했던 것이다. 군인에서 혁명 가로, 정치인으로 탈바꿈하면서 그가 쌓은 공적은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터키인들이 그를 국부로 추앙하는 이유는 그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며 세 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책 속의 기록으로만 존재할 뻔했던 터키를 구원한 영웅이 기 때문이다. 별다른 준비없이 1차 세계대전에 독일편에 서 서 참전했던 터키는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20세기 초반,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에 의해 국 가의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약소국으로 전락 했다.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은 사라지고 영토가 분할 점령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케말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연전연패하는 와중 에서도 유일하게 싸우는 족족 승리하는 뛰어난 전 공을 세웠다. 조국이 사멸해가는 아픔을 겪고 있던 터키인들에게 그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에 견줄 수 있을 만큼 기쁨과 구원의 상징이었다. 1915년 4월 일어난 갈리폴리전투(이듬해 1월 초 종료)는 케말이라는 이름을 한껏 드높이는 결 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군대의 질과 양적 측면에서 절대적 열세였 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에 대항해 불가능하다고 생각됐던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 었기 때문. ‘지상최대 전투 갈리폴리’란 영화로도 유명한 1차 세계대전 최고의 승부처 갈리폴리 전투를 살펴보자. 오스만 해군은 흑해 연안의 에데사, 얄타 둥 러 시아 기지를 공격했다. 오스만의 술탄은 영국 프 랑스 러시아에 대해 지하드(jihad, 성전·聖戰)를 선언했다. 이로써 오스만 투르크는 본격적으로 1차세계대 전(1914~1918년)에 가담한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가르는 해협이 봉쇄되자 러 시아 흑해함대가 지중해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됐다. 영국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러시아함대의 출구 를 뚫기 위해 1915년 2월에 다르다넬스해협의 지중 해쪽 갈리폴리반도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의 갈리폴리 공격(Gallipoli Campaign)은 실패로 끝났다. 영국(호주 뉴질랜드 등 ANZEC군단 포함)과 프랑스 연합군 사상자가 25 만명, 오스만군의 사상자도 25만명에 이른다. 이 전투에서 터키군은 용맹스럽게 싸웠다. 케말 파 샤 등 젊은 장군들은 이 전투 승리로 후에 터키의 영 웅이 됐으며, 처칠은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연합군을 맞아 지리멸렬 하고 적은 병력과 열악한 무기로 연합군을 격퇴한 터키군의 기적적인 승리의 중심에는 무스타파 케 말 파샤라는 전설적인 장군이 있었다. 연합군은 안이한 생각으로 해군만의 단독작전 으로 다다넬스작전을 시도했다. 상륙작전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결국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 극의 씨앗이 됐다. 초전에 참담한 피해를 맛본 연 합군은 3월 12일에서야 영국 총동원군 사령관 해 밀턴에게 부랴부랴 해군을 도와 갈리폴리에 포진 한 터키군을 제압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타이밍을 놓쳐 주변 에 당장 동원할 병력이 부족, 시간이 갈수록 승리 할 가망이 낮아져만 갔다. 이렇게 6주의 시차를 두고 이뤄진 연합군의 지상 군 공격은 탄약과 병력 부족으로 허덕이던 터키군에 게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됐다. 초전에 결사적으로 갈리폴리를 방어한 터키군은 곧바로 10만의 병력과 장비를 충원받아 요새를 재 건하고 방어선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강화했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침략자를 격퇴하겠다는 터키 군의 의지는 시로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영국군과 ANZEC군, 프랑스군으로 급하게 꾸 려진 연합군은 해밀턴 장군의 지휘하에 드디어 1915년 4월 25일 상륙을 개시하기로 했다. 그러 나 이 계획 역시 어설프고 엉성했다. 그들은 언덕 위의 진지를 쉽게 점령할 것으로 자 신, 상륙한 후 해안가에 확실한 거점을 확보하면 그 이후는 일사천리라고 여긴 것. 이런 안이함은 이후 다다넬스해안을 피로 물들이는 비극을 초래했다. 하지만 정작 오스만투르크군은 적의 상륙을 해안 가에서 막을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가파른 고지 위에 자리잡은 터키군은 연합군이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고지 위로 올라오면 그때서야 완전히 쓸어 버리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장 8개월간 이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은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간의 철저한 준비와 통신망 확보가 필요하고 항상 시간이 엄수돼야 함에도 계속 엇박 자를 냈다. 연합군은 해안에 상륙했지만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있어야 했다. 반면 터키군은 영리하게 방어에만 집중, 엄청난 포격 속에서도 참호에 웅크린채 한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고지를 향해 기진맥진 기 어오르는 연합군을 향해 기관총탄 세례를 퍼부었 다. 터키군도 못지않은 인명피해를 입었으나 인내 심과 사기는 연합군을 압도했다. 연합군은 애초부터 터키군을 깔보았고, 게으 르고 겁쟁이들이므로 전투가 시작되면 꽁무니를 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자만심으로 가득찼다. 1916년 1월 연합군은 굴욕적인 패배를 감수하고 철수했다. 세계 최강해군을 보유한 영국은 자만심 에 육군과의 공조도 없이 너무나 쉽게 무지막지한 ’돌격 앞으로!‘로 대망신을 당했다. 반대로 오스만군은 갈리폴리를 방어하는데 최 고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일치단결, 무서운 투혼을 보여줬다. 특히 지휘관 중 케말 파샤는 단연 군계일학이었 다. 그는 전투 초기에 터키군 19사단에서 중령계급 의 무명이었는데 독일고문 산더스 장군이 그의 능 력을 알아보고 수백명의 동기들과 상급자들을 제 쳐놓고 단박에 그를 사단장으로 임명, 갈리폴리전 투 내내 최고의 지략과 용맹을 떨쳤다. 이렇게 갈 리폴리전투에서 오스만군은 승리했으나 중동지역 에서 참패하고 이어서 동맹국이 항복함에 따라 오 스만투르크제국은 와해되기에 이른다. 케말 파샤의 승리는 비장함, 절실함, 냉정함, 철 저함이 어우러진 투혼과 인내의 결과였다. 케말은 갈리폴리전투에 임하면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 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제국이 무너지고, 우리 에겐 노예가 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 리는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죽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개죽음이 아니 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의 밑거름이 될 것 이며, 그대들 이름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말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은 1881년 오늘날의 그리스 살로니 카에서 오스만 투르크 세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무스타파 케말이며, 케말 파샤는 케말 장군이란 뜻이다. 12세부터 군사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904 년 이스탄불에 있는 하비에르 육군참모대학에 입 교했다, 그는 군사학 뿐만 아니라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수학교사로부터 완벽함을 뜻하는 ’ 케말‘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을 자신의 정식 이름으로 사용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군사교육을 받는 동안 청년터 키당(Young Turks)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했다. 이 운동은 터키의 청년장교들로 구성된 정치단체 로,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전제왕정인 술탄제를 폐지 하고 터키민족주의와 독립, 민주주의를 추진하는 급진적·혁명적인 정치운동을 하는 정당운동단체. 이로 인해 무스타파 케말은 고급장교임에도 불 구하고 정당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기에 190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변방지역에 시리아 쪽에 배 치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군인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 아 1911~12년 이탈이아-터키 전쟁 때 소령으로진급해 참전했으며, 불가리아 소피아 주재 무관을 지내다가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벵가지전선으로 전속되어 활약했다. 오스만제국이 독일측을 편들어 참전한 1912~ 13년의 발칸전쟁 때에는 군사령관으로서 다르다넬 스해협과 동부국경의 방위를 맡아 공훈을 세웠다. 1915년 케말은 대령 계급으로 갈리폴리반도의 로도스토 지역에서 제19사단의 지휘를 맡았으며, 1915년 4월부터 시작된 영국군의 갈리폴리반도 상 륙작전을 격퇴하는 반격전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리 기도 했다. 이때의 공훈으로 정부는 그를 장군으로 특진시켰으며, 제16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1916년까지 아나톨리아 방위에서 연합군과 전투를 벌여 혁혁한 공을 세우며 연승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독일군의 지휘를 받는데 항 상 불편해했고 잦은 마찰도 있었다, 그러던 중 독 일 지휘관과의 다툼에서 그의 언동에 분노한 오스 만군 장관은 1917년 무스타파 케말을 군단장직에 서 해임하여 보직을 떼어내게 된다. 그러나 1년 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현역으 로 복귀해 팔레스타인 주둔 제7군 사령관직을 맡 았고, 그는 독일군지휘부 보다 항상 독창적인 작전 등으로 승전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이 독일 측에 서서 가담한 1차 세계대전은 결국 연합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나라는 사분오열되는 오명(汚名)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케말은 나라의 분열을 막고 터키만의 독립 을 성취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게 된다. 또한 그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을 모두 아우르는 국가로 독립시키기 위해 터키를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에 기초한 민주국가 로 변화를 모색한다. 케말이 터키를 술탄(sultan, 이슬람세계에서 성 속의 지배자) 왕정(王政)국가에서 근대 민주국가 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1차 세계대전 이 후 이스탄불과 마르마라해변의 이즈미르 등지가 연힙군에 점량당하게 되고 전쟁에 패한 술탄정부 가 연합국으로부터 세브르조약(영토포기, 영토분 할 등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하자 그는 지지세력들 과 민족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오스만제국은 국력이 쇠약해져서 왕정을 반대하는 역신(逆臣)인 케말이 군사 집단행동을 해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8~9월 그리스군이 침공해 앙카라 주변 까지 진격하자 이들을 사카리아 강변에서 완전히 궤멸시키게 된다. 앞서 케말은 1920년 지지세력 들과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년간 군사 작전을 진두지휘해 그리스 점령군을 터키에서 몰 아내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후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서 1922년 11월 술탄제도(왕정)를 폐지하고, 이듬해 7월 연합국과 의 사이에 술탄제국 당시 체결된 불평등조약을 새 로운 로잔조약으로 변경시켰다. 그해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정한 공화제를 선포 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인민공화당을 창 설해 정당정치를 확립했다. 그는 신생 터키공화국 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명제 아래 서구식 법치와 민주 정치제도로 근대화하고자 끊 임없이 노력했다. 터키 국회는 1934년 무스타파 케말에게 ’조국 의 아버지‘란 뜻의 ’아타튀르크‘ 경칭(敬稱)을 수여 했다. 그는 평생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분 투했으며, 대통령 재임 중이던 1938년 57세의 나 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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