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휘
한국안보평론가협회 이사장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예) 육군 준장

  몇 해 전 나는 뉴욕에 있으면서, 미국인들이 맞는‘재향군인의 날’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11월 11일은 미국 재향군인의 날이다. 이 날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 불란서에서 휴전협정을 맺은 날이다. 미국은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해마다 미국 전역에서 전몰용사와 재향군인을 위한 추모행사와 기념식을 펼치고 있다. 그 행사의 일환으로 거행 되는‘뉴욕 퍼레이드’는 90회가 넘어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행사다. 
  이 날 뉴욕 맨해튼 매디슨 스퀘어파크에서는 마이클 불름버그 시장을 비롯한 군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과 퍼레이드가 있었다. 한국인으로는 김병길 장군과 주 뉴욕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김창진 영사가 기념식 단상에 올라 자리를 빛냈다. 2만 여명이 펼치는 퍼레이드에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의 미국 동부지회, 해병 전우회, 월남 참전 전우회, 특전 동지회 등 한인 유관단체가 참석했다. 이 행사에는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전쟁, 민간단체, 학생들이 자기 고유의 복장을 하고 참석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고조시켰다. 군악대와 많은 꽃차가 참여하고 2차 대전 때 사용 되던 차량 등 볼거리가 많았다.
  40여 개의 미 군 묘지와 170 여 향군병원에서도 해마다 기념식을 갖는다. 6·25 전쟁의 총성이 멎은지 반세기가 넘은 오늘, 이 병원들의 병상에는 한국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아직도 신음하고 있는 불치의 상이용사들이 있다. 송구함과 고마움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 나라의 젊은이 4만 명이 전사하고 10만 명이 부상당한 6·25 한국전쟁. 자칫 잊혀진 전쟁으로 묻힐 뻔했던 한국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뉴욕 키세나 공원 기념비와 워싱턴의 한국전참전용사 기념몰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가를 현지에 와서 보고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 곳 사람들은 더 많은 추모비와 기념비가 세워지길 바라고 있다.
  미국인들은 재향군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자유 수호를 위해 온몸을 바친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리는’정신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향군인의 날을 공휴일로 정하고 이 날의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행렬하는 노병들을 박수 치며 격려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요 본받고 싶은 전통이다.
  ‘대한민국 재향군인의 날’은 10월 28일이다. 그러나 재향군인의 날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재향군인 장병들도 이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공휴일로 정하여 특별한 행사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전몰장병과 재향군인에게 깊이 감사하고 애도의 정을 느껴야 할 역사적 배경을 가진 국민이 우리가 아닌가. 먼 역사는 그만두고라도, 당장 우리 세대가 겪은 6·25 전쟁만 돌이켜 보아도 이리 무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를 이 처럼 잘 살게 해 준 그 분들의 공적은 단순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지켜준 나라요, 자유요, 민주주의요, 인권이다.
  “재향군인회는 예산의 30%를 국고에서 지원 받고도 극단적 정치 활동을 하는 기형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날을 세우는 비판세력이 횡행하는 사회,“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재향군인회의 활동을 그대로 지켜봐야 할 것인가?”라고 비수를 들이대는 좌파 집단들이 날뛰는 나라, 분통이 터지고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목숨을 걸고 청춘을 바쳐 지켜낸 나라에서 되돌려 받는 대접이 이러하니, 국가가 위급 상황에 처했을 때 누가 진정 나라 위해 목숨 거는 싸움터에 나서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버지니아 대학에서 있었던 사건처럼 툭하면 총기 난사사건이 터지고, 인간을 파괴하는 마약이 범람하고, 마피아 갱 조직이 공권력을 조롱하는 오구잡탕 인종의 집합체처럼 보이는 미국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의 자리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1%의 건전한 지도층과 미국시민의 애국심이다. 9·11 사태 이후 이라크파병을 국가가 결정하자 전쟁터로 나가겠다는 지원자가 그렇게 많았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요, 젊은이들의 일시적 객기가 아니다.
  뉴욕의 브루클린 지역을 산책하면서 몇 가지 눈에 뜨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집 화단에는“Support our Troops 우리들의 군대를 돕자”라는 글이 적혀있는 깃발이 꽂혀있고, 또 마을 교회 정원에는 아담한 돌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거기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이 지역 출신으로써 전시에 국가를 위하여 복무한 자들의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이 마을에선 국경일이나 기념일이 아닌 평일에도 여기저기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규모가 큰 어떤 집에는 관공서에서나 볼 수 있는 높다란 국기게양대를 설치해 성조기를 주야로 매달아 놓은 곳도 있다. 미국인의 국기 사랑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상통한다. 국경일에도 아파트 창틀에 태극기가 별로 걸리지 않은 우리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미국에서 경험한 재향군인의 날. 국가와 국민, 안보와 군인, 민주주의와 자유, 애국과 참여 정신 등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