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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할 여지가 없어야 비로소 살 수 있다!”
기자 : 관리자 날짜 : 2018-07-03 (화) 21:02

포기를 모르는 한신 리더십
- 용기·의리·포용·智謀·감성 갖춘 ‘용병술의 達人’ -




류석호
강원대 외래교수
전 조선일보 취재본부장
변협 등록심사위원

“도망할 여지가 없어야 비로소 살 수 있다!” 한(漢)나라의 개국공신이자 명장인 한신(韓信·출생 ?~사망 B.C 196년)이 그 유명한 ‘정형전투(井陘戰鬪)‘에서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쓰면서 한 말이다.

한고조 3년(기원전 204년) 10월 한신은 새로모집한 1만의 군사 등 3만의 한나라 병사들을이끌고 태항산(太行山)을 넘어 동쪽으로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羽)의 부용국(附庸國)인 조(趙)나라를 공략했다. 한신의 군대는 마침내 하북성 정형구(井陘口)에서 조나라 군대와 맞붙었다.

조나라 군대는 20만으로 7배가 많았다. 더욱이 한신의 군대는 질이 아주 형편없었다. 오랜 세월 단련된 군대 중에서 ‘하북평정(河北平定)’을 위해 고급 군을 따로 뽑은 게 아니라, 훈련이 덜 된 병사를 긁어모아서 간신히 머릿수만 채운 상황.

조나라 군대는 한신의 군대가 도망치자 승기(勝機)를 잡았다고 판단, 모두 진영을 나와 한신의 군대를 쳐부수기 위해 진격했다. 하지만 의외로 한신의 군대는 쉬 무너지지 않았다. 한신이 강을 뒤로 하는 진(陣)을 쳤기 때문. 바로 ‘배수진(背水陣)’이었다.

배수진은 뒤에 강을 두고 싸움을 하는 전법으로, 패할 경우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아 위험한전법이었다. 하지만 뒤에 강이 있기 때문에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한신의 군사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한신은 위험한 전략을 적절하게 구사해서 조나라 군을 막았다.

이렇게 되자 조나라 군대는 한신의 군대를 깰수 없게 되어 당황했다. 이들은 자신의 군영(軍營)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조나라 군영에는 이미 한신의 깃발이 걸려있었다.

처음부터 한신은 배수진을 치고 적을 막는 동안, 별동대(別動隊)를 보내 조나라 군영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이런 계책(計策)을 까맣게 모른조나라 사령탑 성안군 진여는 한신의 군대를 얕잡아보고 쳐들어갔다가 자신의 군영만 뺏긴셈이었다.
앞뒤로 한신의 군대에 포위당한 꼴이 되자,조나라 군대는 장수들의 명령도 듣지 않고 도망쳤다. 한신은 이 때를 노려서 조나라 군대를완벽하게 쳐부쉈다.

한신이 벌인 큰 싸움 9차례 중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 가장 극적으로 이긴 전투가 ‘정형전투’ 였다. 조나라군의 궤멸을 가져온 이 전투로 한신은 하북(河北)진출에 성공했고, ‘초한(楚漢) 전쟁’의 전황도 급변했다. 한신은 우여곡절 끝에 한왕(漢王) 유방으로부터 ‘파초대장군(破楚大將軍·항우의 초나라를격파하는 한나라 군대의 최고사령관)’의 임명장을 받는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임명장만 수여할 게 아니라, 대장단(大將壇)을 지어놓고 만군(萬軍)이도열한 가운데 한왕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인장과 보검을 내려줄 것을 요구한다. “나를군통수권자로 인정한다는 위풍당당한 의식(儀式)을 거행해 달라”는 주문이다.

이런 합당한 격식과 예를 갖추지 않고서는 한미(寒微)한 자신이 번쾌 등 기존의 기라성(綺羅星) 같은 유방 휘하 장수들에 가려 존재감이 없어질 뿐 아니라, ‘종이호랑이’에 불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
이런 한신의 ‘조직 장악 리더십’은 400년 뒤삼국지(三國志)에서 재현된다. 촉(蜀)의 유비(劉備)가 관우, 장비를 대동하고약관 26세의 백면서생 제갈량(諸葛亮)을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군사(軍師)로 맞아들이는장면 말이다.

한신은 맨 처음 항우의 휘하에 몸을 의탁했으나, 여러 해가 지나도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실의에 차 있던 한신은 몰래 도망쳐 유방에게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찬밥신세는 계속됐다.유방 또한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창고관리나 맡길 뿐이었다.

기회를 잡기 위해 애쓰던 한신은 어렵사리 승상 소하(蕭何)와 알게 되고, 그의 포부와 실력을간파한 소하는 수차 유방에게 한신의 발탁을강력 추천했으나 의심 많은 유방은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한신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판단하고 유방의 진을 떠나버렸다. 한신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소하는 밤새 말을 타고 쫓아가서 그를 설득해 다시 데려 왔다. 결국 한신은끈질긴 시도 끝에 오랜 염원인 대장군(大將軍)에 오른다.

항우에 비해 훨씬 열세였던 유방은 관중(關中) 땅을 먼저 차지하고도 항우에게 양보하고변방인 파촉(巴蜀) 지역으로 물러났다. 그 땅은길이 험해 군마(軍馬)가 이동하기 너무나 불편한 곳이라 아주 비좁은 ‘잔도(棧道)’로만 다녀야하는 오지(奧地) 중의 오지. 유방의 군대는 그 들이 지나온 ‘잔도’를 끊어, 반항의 의지가 없음을 보이며 항우를 방심하게 했다. 그리고 한신은 실력을 키운 다음 기원전 206년 불질렀던 잔도(棧道)를 복구하는 척 적군의 시선을 돌려놓고, 군대를 끌고 자신이 직접 발견해 낸 옛길을찾아내 진격해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일거에관중(關中)을 점령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허허실실(虛虛實實)의 백미(白眉)다.

한신이 제(齊)나라를 공격할 때는 항우가 20만 대군을 파견, 연합군과 싸우게 됐으나 한신은 호북(湖北)성 유수 상류에 둑을 쌓아 물을 가뒀다가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을 강 가운데로끌어들여 죽인 후 승리로 이끌었다.

한신은 이후에도 안휘(安徽)성 영벽(靈壁)현해하전투(垓下戰鬪)에서 십면 (十面)에 매복을설치하고 초나라 군대를 포위한 후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해 심리전(心理戰)에서 이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성어(成語)가 탄생한 배경이다.

이로써 유방은 4년간에 걸친 초한전(楚漢戰)에서 승리, 천하를 통일했다. 한 전략가의 빼어난 전략적 리더십과 그를 알아본 리더의 신뢰가 천하를 얻게 한 원동력이된 것이다.

한편,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보다도 유리한 입장에 처하여 천하를 삼등분할 수 있는 기회를 맞고도 스스로 이를 포기한 것은 유방으로부터 받았던 깊은 은혜를 배반할 수 없다는인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뛰어난 능력과 역량 때문에 한신(韓信)은 오히려 천하를 통일한 한왕 유방의지속적인 견제와 의심 속에 제거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한신(韓信)은 유방의 왕후(王侯)인 여태후(呂太后)와 상국(相國) 소하(蕭何)의 계략에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처럼 한신의 일대기는 극적인 요소가 많으며 다양한 일화 속에 한편의 대하 드라마처럼 전개되어 대부분 학자들이 최고의 문학적 역사이야기로 평가하고 있을정도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비롯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그와 관련된 고사성어(故事成語)가 20개를 헤아릴 정도다.

특히, 그는 전술과 전략의 귀재(鬼才)로 통했다. 관심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고 상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을 이용해 허를 찌르는 전법을 사용하였다[고사성어: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 또, 물을 등 뒤에 두고[배수지진(背水之陣)]싸우게 하여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이 죽을 고비에서 필사적으로 싸워전세를 역전시키는 등 신출귀몰한 전술을 운용하였다. 그리하여 한신은 70여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모두 승리하여 가히‘병법(兵法)의 신(神)’으로 불렸다.

어떻든 한(漢)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한신’이란 명장(名將)이 없었다면, 천하통일(天下統一)의 대업(大業)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초장(初場)에 항우에게 처참하게 대패하여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에게 필적할만한 인물은 의심 많고 우매한 유방이아니라, 그의 가신(家臣)인 한신이라고 말하는사람도 많은 게 사실이다. 결국 그를 끌어안는 자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한신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젊어서는 큰 뜻을품고 흉금(胸襟)이 넓었으며, 대인지심(大忍之心)이 있었다.

‘과하지욕((胯下之辱·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는치욕)’을 감수한 경우가 대표적 사례. ‘이 보다더 큰 치욕이 없음’을 비유한 이 고사성어(故事成語)는 훗날의 영광을 위해 순간의 치욕을 잘참아낸 그의 인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신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회음(淮陰) 출신으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이웃집에서 밥과반찬을 얻어먹으며 힘들게 자랐다. 이렇게 어렵게 살았으니 늘 주변의 냉대를 받았다.

어느 날 동네 불량배 패거리 중 하나가 “네가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죽음이 두려우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하고 모욕을 주었다. 이에 한신이 그 청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허리를 굽혀 그의가랑이 밑으로 기어 지나갔다. 온 시장바닥 사람들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한신은 ‘사람을 죽이느냐, 치욕을 참고 견디느냐’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 그에게는 천하를 위해 쓰임이 되겠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신은 나중에 자신을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게 한 무뢰배를 치안을 담당하는 중위(中尉·경찰서장급)로 임명해 민심을 얻었다. 원수를 은혜로갚은 통 큰 소대인배(大人輩)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너무 가난해 며칠씩 굶다가 회수(淮水)에서 낚시질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는데, 그모습이 처량해 보였던지 옆에서 빨래를 하던한 노파가 밥을 갖다 주었다. 며칠 동안 배를 채우지 못했던 한신은 노파의 은혜에 감격해, “내반드시 후한 대가로 은혜에 보답하겠소”라고감사했다.

한신은 후에 초왕(楚王)에 봉해 졌을 때, 옛날 자기에게 밥을 주었던 노파에게 술과 안주를 보낸 다음 다시 황금 1천냥을 보내 보답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표모반신(漂母飯信·빨래하는 아낙이 한신에게 밥을 먹였다)’과 ‘일반천금(一飯千金·밥 한 그릇이 천금이라는 뜻으로은혜를 후하게 보답함을 비유)’의 고사이다.

‘부귀에 현혹되지 않고 빈천하다고 해서 뜻을굽히지 않으며, 강제로는 굴복시킬 수 없으니이를 일러 대장부(大丈夫)라 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신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대장부였다.

원래 한신은 전쟁을 치르는 틈을 이용해 ‘한신병법(韓信兵法)’이라는 책을 써서 후세에 남기려 했다. 하지만 겨우 3장까지 썼을 때 여후(呂后) 등에 의해 피살되었고, 나중엔 그나마 완성된 3장마저도 모두 실전(失傳)되었다.

그는 언제나 준비에 철저한 장수였다. 힘보다는 지략(智略)으로 승리하는 당시로서는 매우보기 드문 유형의 장수였던 것. 적군보다 먼저지형과 지물을 익히고 그 지형을 이용하여 군대를 배치하고 적군을 유인하여 궤멸시키기도하는 등 차원이 다른 장수였다.

뒤늦게 유방은 천하통일에 가장 크게 기여한대장군 한신을 몇 가지 지나간 죄를 트집잡아죽게 한 자신이 옹졸했음을 뉘우치며 “한신과같은 위대한 명장은 전세에도 없었고, 후세에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한신을 '불세출의 명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한신이 직접 개발한 전법인 '배수진'이나 '십면매복(十面埋伏)의 계(計)', 가장 고차원적인심리전법 '허허실실(虛虛實實) 전법' 등은 삼국지(三國志)에서 조조(曹操)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따라할 정도다.

한신에 대한 이야기는 2011년 중국드라마 전문채널인 CHING에서도 ‘천하의 명장 한신(원제 ’대장군 한신(大將軍 韓信)‘이란 제목으로방송되는 등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비록 천하를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군사전략가로서, 뭣보다 한 인간으로서 위대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의 호출을 계속 받고 있는 게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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