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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러시아 및 만주지역 한국독립운동사 재조명(6)
기자 : 관리자 날짜 : 2018-07-03 (화) 21:15



정행산
전 경기매일신문 주필 겸 사장

노령(露領)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2)
극동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조선독립군 조직인 동의회(同義會), 일명 연추의병(煙秋義兵)은 국내로 진격, 국경 근처의 일본군 수비대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시)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19사단 등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소규모 부대로 나뉘어 치고 빠지는 연추조선독립군의 유격전으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무렵(1908년) 전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이자 헤이그 밀사의 정사(正使)였던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이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연추로 망명해왔다. 고종 황제는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원명은 한일협상조약. 제2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함)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국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이상설을 정사로,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부사(副使)로 하여 밀사를 파견했었다.

일제는 헤이그 밀사 파견을 문제 삼아 1907년7월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궐석재판을통해 이상설에게 사형을, 이준·이위종에게는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상설에 이어 그해 음력 7월 조선 유림(儒林)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을미의병(乙未義兵)의 대표적인 의병장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이 그가 이끌던 호좌의진(湖左義陳)의 의병(義兵) 일부와 함께 만주를 거쳐 연추로 망명해와 연해주의병에 합류했다. 연해주의병은 1909년까지 활동을 계속하다가 일본군의 증강과 일본과의 분쟁을 원치 않는 러시아 당국의 단속강화로 점차 쇠퇴해갔다.

1908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포단체인 한국국민회(韓國國民會)가 경영난으로 휴간한 해조신문을 인수, ‘대동공보’로 개칭하여 발간하기 시작했다. 교포의 계몽과 항일사상 고취를 위해서였다. 신문 발간에 따른 자금의 대부분은 최재형이 지원했다. 최재형은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이상설·홍범도(洪範圖)·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김익용(金翼瑢)·강택희(姜宅熙)·엄인섭 등과 함께항일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취임했다.
권업회 사무실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지금의 하바로프스카야 거리에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誠齋 李東輝)의 집 옆이다. 하바로프스카야 거리 한쪽에 현재 신한촌 기념비가 서 있다.

최재형은 신한촌에서 대동공보 발행을 지원하는 한편 권업회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 발행도 지원했다. 권업신문은 1912년 5월신채호(申采浩)·김하구(金河球) 등에 의해 권업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한글신문이다. 주필은신채호·이상설·장도빈·김하구 등이 맡았으며,발행인은 러시아인 주코프(Jukov)였다.

산운 장도빈(汕耘 張道斌, 1888-1963)은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때 이미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불리던그는 1902년 평양감사의 천거로 당시 대한제국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입학했다.

한성사범학교 졸업 후 장도빈은 1908년 봄 약관의 나이(21세 때)에 황성신문(皇城新聞) 주필박은식(朴殷植)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논설위원에 발탁되어 신채호·양기탁(梁起鐸) 등 당대의 대논객(大論客)들과 함께필진으로 일하면서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한매일신보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주필이 되어 친일내각및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맞서 투쟁을벌였으며, 신민회(新民會) 비밀회원으로 가담하여 국권회복운동의 선봉에 섰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일간 신문사의 주필이 된 경우는 한국 언론사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장도빈은 학식과 판단력, 분별력, 논지와 문장력 등에서 뛰어났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검거열풍이일자 국외 망명길에 올라 1912년 북간도로 피신한 장도빈은 이듬해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신한촌에서 양기탁·박은식·신채호 등 옛 대한매일신보 창간 주역들과 다시 해후했다.

그는 이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이어가는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륙 쪽으로 약 1백여킬로미터 떨어진 우수리스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옛 한민족(韓民族)의 흔적에 주목했다. 그리고 오랜 답사 끝에 마침내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천년 가까이 묻혀 있던 발해(渤海)의 유적을 찾아냈다. 장도빈은 잊혀진 발해사(渤海史)를 거의 최초로 복원해 정립한 민족주의 역사학자이자 훗날 서울에 단국대학을 설립(1948년)한독립운동가이다.

권업신문은 처음에는 일제의 압력을 피하기위해 발행인을 러시아인으로 하였으나, 일제의압력이 계속되어 1914년 9월 러시아 정부로부터 발행금지를 당했다.당시 연해주에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크라스키노(하산. 발해 유적 이 발굴된 지역이자 안중근의사가 이곳 추카노프카마을에서 11명의 동지와 단지동맹을 맺고 대한독립 혈서를 썼다)에는 최재형·이범윤·홍범도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동휘(李東輝)·김하석(金夏錫)·김치보(金致寶) 등이, 니콜리스크(지금의 우수리스크·발해시대의 성터가 남아있으며 이상설이 이곳에서 1917년 3월 2일 48세로 병사)에는 문창범(文昌範) 등이 자리를 잡고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최재형은 1919년 3·1독립만세시위 이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명예회장 겸 외교부장으로 활약하는 등 1900년 초부터 1920년까지러시아지역에서 조직된 주요 조선인 단체의 책임자로 고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회 의정원(의장 이동녕) 회의에서 최재형은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연해주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겠다며 취임을 사양했다.

그 후 1919년 11월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에서 허만수(許萬洙)·김좌두(金佐斗)·이용(李容)·김하석·김규면(金圭冕)·김만겸(金萬謙) 등과 함께 항일무력단체인 독립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결심한 안중근은 노보키예프스크의 최재형 자택에 기거하면서 최재형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노보키예프스크는 지금의 크라스키노 지역을 말하며 연추·얀치혜·추카노브카로 불리기도 했다.

최재형의 딸 올가 페트로브나는 회고록에서“노보키예프스크에 살 때 안응칠(안중근 의사의아명)씨가 누군가를 조선민족의 이름으로 응징해야 한다며 우리 집 마당 벽에 사람 셋을 그려 놓고 권총사격 훈련을 했다. 그 후 그 분이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인 요인을 처단하고 붙잡혀 사형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회상했다.

최재형은 1909년 10월26일의 안중근 거사 후엄정한 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 당국을 움직여 안 의사를 러시아 법정에 세우고자 노력했으나 일제의 반대에 부딪쳐 무위로끝나고 말았다.

일본군의 소련 극동 시베리아 점령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서방국가들이 개입, 이듬해 3월경 이른바 국제간섭군을 시베리아(소련 원동지역)에 상륙시켰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국제간섭국은 체코군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했으나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공산주의가 세계 각국으로 확산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볼셰비키 혁명세력의 기세를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에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석방되어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고국으로 돌아가던 체코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독립군에게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무기를 싼 값에 넘겨준 사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술하기로 한다.

대륙 진출을 꿈꿔온 일본은 국제간섭군이 시베리아에 상륙하기로 하자 ‘영·일(英·日)동맹’을명분 삼아 일본도 국제간섭군의 일원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했다. 이렇게 해서 미·영·불·일 4개국은 각각 2만 8천 명씩의 군대를 파병하기로합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무려 7만3천 명의 대군을 시베리아에 상륙시켰다. 국제간섭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 등 소련 극동의 태평양 연안 일부 지역만 점령하기로 약속했으나 일본은 이 같은약속을 어기고 소련 내륙 쪽으로 진격해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했다.

1920년 러시아 반(反)혁명세력(백군)이 시베리아에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볼셰비키 적위군(赤衛軍·정식 명칭은 노농적군<勞農赤軍>)에 의해 무너지면서 러시아 원동지역이 마침내 혁명세력에 의해 평정되자 1920년 4월4일미·영·불 등 국제간섭군은 연해주에서 철군한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남았다.

미·영·불 국제간섭군이 철수한 바로 그날 4월4일에서 5일 사이에 철수하지 않고 있던 일본군이 시베리아의 볼셰비키 적위군 부대와 조선인 마을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한 달 전 볼셰비키 적위군의 극단주의자 트랴피친 부대가 일본군 주둔지와 일본 거류민들을 습격해 수천명을 사살한 데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4월 참변’으로 불리는 이때의 일본군 습격으로 연해주 일대의 조선인 수천 명이 살해되거나 부상을 당했고 조선인 마을과 단체들이 거의 모두 불태워졌다. 한국독립군 조직도 재기가 어려울 정도로 와해되고 말았다.

이 무렵 최재형은 적위군의 항일 파르티잔 투쟁에 가담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4월4일밤늦게 노보키예프스크(연추)의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그에게 파르티잔 부대로 도망갈것을 권했으나 최재형은 “내가 도망치면 우리가족 모두 일본군에 죽는다. 나는 살만큼 살았다. 우리 가족을 대신해 내가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최재형의 딸 올가 페트로브나의 회고록).

최재형은 4월 5일 새벽 노보키예프스크의 자택에서 체포되어 그곳 감옥 뒤편 왕바실재라는 산기슭 언덕에서 김이직(金利稷)·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周珌) 등과 함께 총살당하고 만다. 그의 나이 만 예순 살 때였다.

일본군은 최재형 등 조선독립운동가들을 학살하고 땅에 묻은 후 흔적을 감추기 위해 평토(平土)를 만들었다. 최재형은 연해주 일대의 조선인 사회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부호였으며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부호였던 최봉준(崔鳳俊)과 쌍벽을 이루었다. 최재형이 살았던 첫 번째 집은 우수리스크 시 수하노바 32번지에 있으며, 마지막 거주지였던 옛집은 우수리스크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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