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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발현되는 연합훈련의 진정한 가치
기자 : 관리자 날짜 : 2018-07-03 (화) 23:39


장광일
동양대 국방과학기술대학장
예비역 육군 중장


훈련은 동서고금을 통해 군대를 유지하여 전승을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이다. 군은 전,평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평시에는 전쟁을 억제하고 위기 시에는 전승을 보장해야 한다. 전승을 보장하는 길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철저한 훈련을 통해 준비태세를 유지하고 전투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미국과 동맹을 맺고 한미연합군으로 편성되어 전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한미동맹의 핵심인 연합사령부는 전투사령부(combatant command)로서 전시에 수행할 전투력 발휘에 올인하고 있다. 그 전투력 발휘의 골간이 연합연습이다. 한미군의 상이한 언어와 문화, 교리와 시스템을 한 나라군대와 같이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바로 연합훈련이고 연습이다. 탁상에서 만든 작전계획을 검증해 보는 것이 연합연습, 워게임(war game)인데 ‘8월 한미연합훈련(을지프리덤가디언,UFG)을 일시 유예한다’고 한다. 한때 연합훈련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필자로서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연합연습을 일시 중지함으로써 북한 비핵화를 촉진시킬 수 있고, 북한의 선의를 기대할 수 있다면 더 큰 억지력를 발휘할수 있다는 측면에서 감내할만 하다. 한미동맹차원의 전략적 결단과 선제적 조치가 한반도평화를 정착하는 새로운 전기가 되길 기대하면서, 전시에 발현된 훈련의 진정한 가치를 역사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한국전 교훈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1950년 7월과8월 중 비가 온 날이 23일, 나머지는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찜통 더위였다. 낯선 전쟁환경에 실전 같은 훈련은 2차대전이 끝난 후 여유작작하게 지내던 미군에게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트루먼 대통령의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참전결정으로 전쟁 발발 5일 만에 일본 큐슈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미24사단의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전선으로 향했다. 열차편으로 대전까지 이동후 다시 육로로 오산으로 이동했다. 죽미령 일대에7월 5일 새벽 3시경에 도착하여 진지를 편성할 틈도 없이 8시경부터 첫 교전을 했다.

훈련부족에 전투준비는커녕 적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호각만 불면 북한군 정도는 알아서 도망갈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과 그날 오후 4시까지 7시간 가까이 분투했으나 스미스 중령은 일생의 가장 후회스런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고, 전투결과는 참혹했다. 부대원 406명 중 60명이 현장에서 순직하고 82명이 포로로 잡히고 21명이 부상했다. 이 첫 전투를 시작으로 미군은 3년간 무려 178만 명이 참전하고 이 중 3만 7천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아직도 찾지못한 실종자가 8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스미스부대 이후 속속 참전한 미군 부대들도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세계최강의 미군이었지만 수년간의 훈련 공백은 실전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쓴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서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인 훈련이 안 된 부대의 전투실패를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전쟁이 경과하면서 나아지긴 했으나 효과적인 연합작전은 상상하기어려운 실정이었다. 벤플리트 유엔군사령관은 한국군의 교육훈련체계 혁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관학교를 교육을 새로 설계하고 각급 병과학교 교육체계를 신설하였다. 미국 조지아 주 포트베닝에 있는 미 육군 보병학교에서는 한국군고급장교를 교육하는 과정을 만들고 한국군 통역을 별도로 두면서까지 체계적인 군사교육을시키고 연합작전을 위한 토양을 만들었다. 전쟁 때 미진했던 효율적인 연합훈련은 미군이 풀지 못한 과제였다. 미군은 정전 직후인 1954년부터 당시 작통권을 행사하던 유엔군사령부 주관으로 한미연합전쟁연습, 포커스렌즈(FOCUS LENS)훈련을 개시하였다. 이 연습이 오늘까지이어진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의 전신이다.

청일·러일전쟁의 교훈 우리나라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청일·러일전쟁은 상대만 바뀌었지 결과를 놓고 보면 매우 유사하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청나라는 비록 국력이 쇄락하고 있었지만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의 내우외환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양무운동으로 군사력의 재정비를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이 파죽지세로 연승연승하며 청나라를 제압했다. 전쟁의 분수령은 그해 9월 15일의 평양전투와 이틀 후 황해해전에서 사실상 판가름이 났다.

평양전투에서 청군은 전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훈련과 기강이 잡군 수준 밖에 안 되어신식무기로 편성되고 기강 잡히고 훈련된 일본군의 적수가 되지못하고 스스로 무너졌다. 해전의 경우, 청나라의 진원·정원호는 7000톤급으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훈련, 탄약, 전투기술이 압도당해 해전이 개시되자마자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격침되거나 도망가기 급급하였다. 당시청국과 일본에 함선을 수출했던 독일의 비스마르크 수상은 “중국은 함정(Hardware)만 사갔으나, 일본은 운용술과 훈련(Software)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04년 개시된 러일전쟁도 전체적인 국력이나 전쟁잠재력 면에서 일본은 러시아의 상대가되지 못했다. 일본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모르고 덤비는 격으로 서양 열강은 러시아의 우세를 예상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여순공방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육전과 해전은 일본의 압도적인 승리로 결판났다. 특히 도고(東鄕)제독이 이끄는 일본의 연합함대는 진해함에 모기지를 차리고 해상 포격술 위주의 피나는 훈련을 하였던 반면 로제스트벤스키가 지휘하는 러시아 발틱함대는 7개월 넘게 지구의 2/3을 돌면서도 훈련 한 번 하지 않고 이동하고 있었다. 마침내 1905. 5. 27~28 이틀간 대마도 북방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한 3척을 제외하고 전멸하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훈련이 지니는 가치는 절대적이고 무한하다. 훈련은 전승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일 뿐 아니라 드높은사기와 엄정한 기강과도 직결된다. 회식으로이어진 사기는 하루를 넘기기 어렵지만, 훈련에서 체득한 충만한 자신감이 진정한 사기이고 싸움에서 이긴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른다.

한미연합훈련의 경우, 과거 남북 간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했을 때나, 1차 북핵 위기가 도래했을 때 일시중단했던 사례도 있었다. 그때는 기대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없었지만이 번 만큼은 어렵게 내린 전략적 결단이 성과를 내었으면 한다. 북한이 비핵화의 진정성 있는 조치를 취해 평화정착의 새 지평을 열어나가길 기대한다. 아울러 한미군당국은 연합훈련의 공백으로 인해 일각에서 우려하는 한미동맹의 형해화(形骸化)라든지 대비태세의 허점이 노정되지 않도록 만반의 노력을 기해줄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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