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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통일방안 고찰과 통일가능성의 모색
기자 : 관리자 날짜 : 2020-02-05 (수) 12:25

이승만 정부는 북한은 한반도에서 불법정부이도 그의 정부는 합법정부라는 기본인식에서 그의 통일정책을 전개해 나아갔다. 제1공화국 정부에서는 제헌국회가 1948년 5월 31일 소집되었을 때 남한의 국회의원 수 200석과 북한의 국회원 100석을 배분하고 북한의 국회의원 의석 100석을 공석으로 놓아둠으로써 북한이 언제라도 UN 감시 하에 자유총선거를 통하여 100명의 국회의원의 선출하고 한국국회에 참가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의 관할권을 북한에까지 연장하겠다는 소위 북한정부 불인정정책을 전개해 왔다.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즈음하여 이 대통령은 그의 통일정책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1)  대한민국은 대내외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수립된 한반도에서 유일 합법정부이며 2)  대한민국은 북한에서의 민주적 선거절차를 통하여 그의 10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이들을 대한민국 국회에 보낼 것을 북한에게 요구하고 3)  만약 북한의 자유로운 의사표시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억압될 경우 대한민국은 무력을 사용하여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한국의 주권을 회복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세 번째 항목이 이승만의 북진 통일정책이었다. 이승만은 무력적 수단도 없이 위협적인 정책 즉 북진통일정책 내지 북한에 대해 멸공 통일을 외치었다.

이승만 정권의 몰락 후 허정의 임시정부와 장면 정부의 시기에는 많은 통일 방안들이 논의되었다. 소위 진보세력들은 통일방안으로 한반도 중립화를 선호했다. 그들은 중립화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분단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의 불일치 또는 일치 때문에 생성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재통일은 한국과 관련된 강대국의 이해관계의 상충이라는 원인이 제거될 경우에만 한국통일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한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강대국 관계의 전이 즉 강대국의 힘의 관계에 변화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협약에 의해서 한국의 통일이 실현된다 할지라도 어떠한 강대국도 한국과 관련된 국제이해관계의 상충에 처하여 한국에 대한 그들의 이해관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이나 소련은 그들의 정치이데올로기를 도외시하고라도 그들의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한국에 무관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일본의 안보 때문에 한국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때 문에 한반도의 중립화통일을 주장했던 자들은 한국의 통일이 국제협상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다면 한국을 비동맹화 시킬 수 있는 중립화 통일방안 이외에 어떠한 대안도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그 좋은 사례가 1955년에 수립된 독립자유 오스트리아의 탄생이다. 이 오스트리아의 독립은 기실 오스트리아의 국가조약을 통한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국 선언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그 당시 재미한국인 학자 김용중 씨와 재일한국인학자 김삼규 씨 등이 한국의 중립화통일을 주장해 왔고 국내적으로 이러한 영향을 받아4·19혁명세력의 일부 주동세력들이 한국의 중립화 통일방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1960년 12월 10일 오스트리아 식 중립화 통일방안은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역사적·문화적 차이 때문에 한국에는 맞지 않으므로 이를 거부한다고 천명하였다.

김일성도 처음에는 남한을 공산화하겠다는 그의 의도가 이 안을 받아들일 경우 좌절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방안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김일성은 1960년 8월 14일 남·북한 경제교류를 바탕으로 한 남·북연방제를 처음으로 제시했을 때 남한에서 일부 진보세력들에 의해 주장된 중립화통일방안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 서울 대학교 내에 설치된 조국통일학생연맹이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함으로써 장면정권을 곤욕스럽게 하였다.

1)  기성세대는 정의로운 민족통일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올바른 주장을 무시할 하등의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것
2)  생략
3)   장면 총리는 한국 통일에 그 목적을 두고 적극적인 외교의 실천과 통일문제에 대한 협의를 위해 미국과 소련을 방문할 것
4)   남북한 간의 즉각적인 우편·통신교류를 실시할 것 등이다.

이를 본 북한은 기존 입장과는 달리 남한의 진보세력의 중립화통일방안을 지지하게 되었다.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군 장교들의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제3공화국(1961~1971)의 박정희는 강력한 반공주의와 국가경제발전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통일정책의 내용은 장면 정권의 그것과 본질에 있어서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하여 이후락 정보부장은 북한의 수도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대신하여 그의 동생 김영주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조국통일의 3대 원칙’에 합의하였다.

3대 원칙이란 1)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 통일 2) 상대방을 무력행사에 의거 하지 않고 평화적 통일 3)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민족대단결에 의한 통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8월 15일 경축사에서 ‘평화통일 3대원칙’을 발표했다. 3대 원칙은1) 남·북한의 상호불가침협정의 체결, 2) 남·북한의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 3)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통한 통일의 실현
등이다. 실은 박 정권은 선 평화, 후 통일을 명확히 하였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의 통일정책은 1982년 1월 22일 대통령 국정연설에서 ‘민족화합·민주
통일방안’ 이라는 보다 구채적인 통일방안을 내용으로 발표되었다.
이 통일방안은 크게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일 전까지의 과도적 단계와 통일단계로 되
어 있다. 그리고 통일을 성취할 때까지의 과도적단계로서 ‘남·북한 기본관계에 대한 협정’을 체결할 것을 북한에 제의하고 있다. 본 잠정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쌍방의 현존 질서와 사회제도의 인정 및 내정에 불간섭
2) 현존 휴전체제 유지
3) 상호 교류와 협력
4) 쌍방의 현존 조약의 존중
5) 서울과 평양에 상주연락대표부의 설치 등이다. 이 통일방안은 북한이 1980년 10월 10일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제시한 소위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 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김일성은 1960년 8월 15일 광복 15주년 경축연회에서 ‘남·북연방제’(보다 국가연합제에 가까운 연방제)를 주장했고 1970년대에는 ‘고려연방제’ 를 주장했는데 1960·1970대에 제시한 북한의 연방제 안은 통일의 과도기적 형태였는데 반해서1980년대 북한의 새로운 연방제 안은 통일의 궁극적 형태이며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한국의 통일방안이 선결조건이라기 보다 전제조건으로서 남·북한 간의 신뢰와 평화구축을 위해 쉬운 문제 즉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이 전제되고 그 후 더 어려운 정치·군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데 반해서 북한의 연방제 안은 그 선결조건을 내세워 전두환 정부는 퇴진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야 하며, 국가보안법·반공법은 폐지하여 공산주의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미국의한반도에 대한 간섭정책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5공화국의 시기에 있어 한국의 통일정책이 보다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수립되고 시행될 수 있었다.

제6공화국 시기(1988~현재)에 노태우 정부 (1988.2~1993.2)의 통일정책을 보면: 통일정책의 환경개선을 위한 북방정책을 들 수 있다. 제6공화국의 탄생 후 국제정치적으로 세계는 대변혁의 징후를 나타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전후 미·소 양극체제의 냉전구조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냉전 구조의 변화는 소련의 개방(glasnost)와 재편(perestroika), 동구공산체제의 와해 등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반도에 영향을 주고 있는 4강은 이 지역에서 다극체제를 형성했던 바, 제5공화국까지 미·소 냉전구조하의 남한, 미국, 일본의 삼각지역체제와 북한, 소련, 중국의 삼각지역체제라는 2중 삼각체제가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이러한 이중체제가 소련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토로이카 정책에 의해 그 균형을 잃고 무너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있어서도 새로운 긴장완화(데땅뜨)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미·소는 아시아 문제에 대해 안정된 정책을 추구하게 됨으로서 제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미·소·중국의 협조 하에 추진할 수 있었고 북방정책을 수립·시행할 수 있었다.

세계가 냉전구조에서 이성과 양식이 지배하는 새로운 화해구조로 전환됨으로서 제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로 하여금 북방정책을 추구하게 하였고 이는 남·북한 대화 재개 및 궁극적으로 통일 환경을 개선케 해주는 데 기여했다.

북방정책이라 함은 한국과 이념과 체제가 상이하면서도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여건 조성을 위하여 한반도의 안보환경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소련, 중국 및 동구권 제국등 주요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고 북한과도 새로운 관계를 설정코자 하는 정책을 의미하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을 추구하는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국은 북한의 동맹국인 소련과 중국과 기타 동구권과 정상적인 국교를 수립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한반도의 현실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도록 유도함으로써 한반도와 이 지역체제의 통일 환경의 개선과 평화정착을 조성하는 것이며2)   소련, 중국 기타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통하여 국제적인 지지기반을 넓히는 것이고, 3)   한국의 진출과 자원공급원 확보를 위한 국가의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북방정책이 추구하는 목표 중 가장 중요한 통일 환경 개선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7·7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선언에서 노 대통령은 국제정세변화와 국민적인 여망에 부응하여 그동안 신장된 한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대북한정책과 북방정책을 상호 연계시키고 북방정책의 기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7·7선언’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주지 않았다. 한국은 북방정책의 결과, 1989년, 1990년 과 1991년에 동구권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은 소련과 1989년 4월 무역사무소를 교환·설치하고 같은 해 9월 30일 정식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1년 1월 30일 한국은 대사급 대표를 임명, 북경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하고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국교를 정식 수립하였다. 한·중 교역량은 1991년 58억 1천만 US$이고 그 후 계속 늘었다. 한국은 1992년부터 대중국 무역에서 흑자를 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 중국 등 공산국가들이 참가하였던데 반해 북한의 불참은 북한을국제적으로 고립시켰음으로 이를 타파하기 위하여 북한은 보다 적극적이고 유연한 대남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989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북한방문과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양의 방북사건으로 국내는 다시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졌고 남·북한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 결과 ‘7·7 선언’은 그 정책의 신뢰보다 오히려 불신을 초래하였다. 1989년 하반기에 북한은 정치적이던 비정치적 분야이든 공식적·비공식적인 모든 접촉을 시도 하였던 바, 정치적으로는 남·북 고위급회담과 국회예비회담을 성사시켰다.

북한은 1990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IPU 총회에 남한의 국회의원들도 초청했다. 비정치적분야에서는 예술·체육· 학술·적십자회담 등이 계속해서 국내 및 해외에서 공식 및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진행된 접촉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회담은 무엇보다도 남·북 고위급 회담이었던 총리급 회담이었다.

서울은 무조건적으로 남·북간의 회담을 재개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견지해 왔던 기능주의적 접근방식을 약간 수정하여 북한에게 양보해 줌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 고위급회담에 참가하도록 유도했다. 북한에서도 정치일변도의 접근법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는 고위급회담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도 남·북 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9월에 이른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의하여 기존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 통일방안은 기실 한국에서 1989년 8월 통일 논의 개방화 이후 당시 신 민주 공화당을 제외한 제도권 정당과 재야 권 및 운동권에 의해서제시된 ‘국가연합제’ 내지 ‘국가연방제’와 같은 통일방안을 십분 감안하여 정부가 제시한, 최초의 국민의 여론을 바탕으로 한 통일방안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당시 김대중 총재를 중심으로 한 평민당이 제시하고 있던 ‘3단계통일론’, 김영삼 총재를 중심으로 한 통일민주당이 주장하고 있던 ‘한민족연합방안’. 문익환 목사를 중심으로 한 재야권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이다. 이들 통일방안들은 제 5공화국에서 제시되어 온‘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비교분석하여 종합한 통일방안이라고 하겠다.‘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우선 민족공동체 회복을 위하여 오늘의 분단과 미래의 통일 사이에 ‘남·북 연합’이라는 중간 단계를 설정하여 민족사회를 하나로 잇고 그 다음으로 통일국가를 이루는 최종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통일의 중간단계인 ‘남·북 연합’에서는 최고의사결정기구로 ‘남·북정상회의’와 쌍방 정부의 대표로 구성되는 ‘남북각료회의’를 설치하며 연합체재하에서 남·북이 서로 합의한 사안을 처리하도록 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통일의 최종 단계는 연방국가나 고려민주연방제와 같은 느슨한 연방제가 아닌 단일국가로의통일이다. 이 통일국가는 ‘민족 성원 모두가 주인이 되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로서 각자의 자유와 인권과 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공화제‘이며 입법기관은 지역성을 대표하는 상원과 주민대표성을 반영하는 하원으로 구성하는 양원제를 제안하고 있다.제6공화국의 통일방안과 북한의 통일방안을 비교 분석하면 전자가 ‘남·북 연합’이라는 과도기적 통일형태 다음으로 민주공화제를 갖는 단일국가로의 통일을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후자는 현존하는 남·북간의 이념과 체재를 그대로 두는 ‘남·북연방제’를 그의 궁극적인 통일형태로 본다.

여하튼 남한이나 북한에서 현재 제시되고 있는 지배적 통일방안은 국가연합제와 국가연방제 중 둘을 혼용한 통일방안이거나 그 두 단계를 거치는 통일방안 혹은 그 하나만을 거쳐서 궁극적인통일을 하는 것을 그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내부간이든 국가 간이든 이들이 느슨히 연합하고 또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남·북한은 1) 안보 공동체 의식 중 공동의 적 2) 공통의 가치체계 및 이데올로기 즉 공동의 정치·사회질서 3) 공통의 대외 정책적 목표 4) 공통의 경제·사회·문화적 이익 들을 가져야 한다. 특히 국가연합에 참여하는 각 지역 정부가 그들 지역정부의 안보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연합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남·북한이 공통의 적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통의 대외정책 목표를 수립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제6공화국 정부와 야당의 국가연합제나 연방제 통일방안은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 대내외 정세를 감안할 때 매우 이상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어 현실정치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통일방안이라고 하겠다.

제6공화국이 1989년 9월에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시했고 1990년 7월 20일에는 노 대통령 특별담화문을 통해 ‘민족대교류기간’을 선포하는 등 적극적인 대북 제안을 내놓았지만북한은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행한 김일성의 시정연설을 통해 ‘조국통일 5대 방침’과 역시 같은 달에 ‘조선반도 내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조국통일을 위한 평화적인 환경을 마련하는 데 대하여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을 발의하였다.

평양은 ‘5대 방침’에서 기존의 입장을 재강조하는 이외에도 교류와 대화를 역설하여 남한의 제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 노태우 대통령이 북한에게 군비통제문제를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논의하자고 제의한 후에야 비로소 북한은1988년 12월 28일 강영훈 총리가 남·북고위급회담을 처음으로 제의한 날로부터 1년 8개월이다된 1990년 8월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의사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1990년 9월 4일부터 7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제2차 회담은 1990년 12월 16일에서 19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는 동안 남한은 북한을 적극적으로 회담에 유치기 위해 군사문제를 남·북회담의 의제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신한국’을 이루는 내용 중의 하나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 되어 평화롭게 사는 통일조국‘이라고 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통일의 3대 원칙을 발표하였던 바 그 첫째가 점진적이고 국민의 합의에 의한 통일이어야 하며 그 둘째 이념보다 민족 우선이어야 하며, 셋째 정상의 만남을 통해 통일을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문민(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영삼 정부는 통일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통일된 민주조국을 건설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토대로 점진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제시한 통일방안은 3단계를 거쳐 단일의 완성된 통일국가로 가는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첫 단계는 화해와 협력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를 규범으로 정치적 화해, 군사적 신뢰 구축, 사회·문화 교류를 통한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 고위급 회담과 분과위원회 및 공동위원회의 활성화를 강조하였다.

그 둘째 단계는 남북연합의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는 남북이 최고결정기구로 ‘남북정상회의’의 개최와 합의, ‘각료회의’의 개최와 합의를 통해 협력하고, 남·북한 국회의원의 교류와 협력을 하는 단계이다.

그 셋째 단계는 단일의 통일국가이다. 이 단계는 ’통일헌법‘을 바탕으로 1민족·1국가·1체제·1정부의 형태로 통일됨으로써 통일의 완성을 가져오는 단계이다.

김대중 정부는 이전의 통일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대외적 환경의 변화 즉 미·소간의탈냉전화가 되어 국제정세가 대한민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북한에는 불리하게 되자, 이러한정세를 이용, 대한민국이 북한을 포용하는 대북포용정책을 제시하였다.   

김대중의 대북포용정책은 ‘통일정책 구현 기’로써 두 단계로 세분화될 수 있다. 1기에 해당되는 시기는 30여년에 걸쳐 마련된 통일론이 이제 현실에서 그 적실성을 검증받고 있는 단계라 할수 있다. 이 실험적 단계는 대북정책에 있어 새로운 발상의 전환에 의한 남북관계의 개선 노력과 북한의 점진적 변화양상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정책 구현 2기는 냉전적 질서를 해체하고 탈냉전적 평화체제로의 이행을 실천하는 시기라고 하겠다.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가 탈냉전의 흐름과 21세기 무한경쟁의 시대로 진입하는 단계에 있다.

하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적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은 사회주의체제의 몰락과 남북한 체제경쟁의 실패로 인해 흡수통일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하에서 북한은 자신의 체제를수호하기 위해 냉전적 질서에 기초한 독특한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있었다.

김대중의 대북포용정책은 30여년의 풍상 속에서 그 내용적 질을 높이면서 변화·발전되어 온 산물이라 하겠다. 대북포용정책이 현실에서체계화되는 시점은 ‘사실 상의 통일’ 상황의 실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의 통일정책은 그러한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초입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의 대북포용정책은 북한에 긍정적 반응을 일으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4일 김대중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 2000년 6월 15일 김대중과 회담 후 김대중과 김정일 간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남·북한 공동선언은 양국의 지도자가 최초로 만나 합의한 것으로 대한민국은 연합제 안을 북한은 연방제 안을 각각 제시하였다.

김대중의 핵심참모인 박지원 전 문화공부장관은 북한의 핵심인사에게 5,000만$을 몰래 주었고 이 대가로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허용했다. 김정일은 그 돈으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사용했다는 것이 추후 알려졌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통일보다 ‘한반도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하였다. 2007년에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일명 10·4선언)을 채택하고 남북 상호 존중을 토대로 정치·군사·경제·사회·문화·인도주의·외교 등의 영역에서 통일을 위한 공동사업을 추진할 것에 합의하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부터는 통일방안 보다 실질적인 남북관계의 개선에 역점을 두었다. 그는’상생·공영의 대북정책‘과 구체적인 추진전략으로 ‘비핵·개방·3000’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방안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개방에 나서면 10년안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통일보다 실질적인 남북관계의 개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4월 25일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우리가 주장하는 국가연합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국가연합은 2국가 2체제다. 이에 반해 북한이 주장해 온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1국가 2체제이다. 분명히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본래 연방제 통일론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공통점에 더 주목해 6·15선언에 ‘서로 공통성이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키는데 동의했다. 보수진영은 이 점을 근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종북‘으로 의심했다. 기본 인식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보수 진영은 문재인 대통령도 중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제시해 온 통일방안으로 통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독일의 통일처럼 우리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의 세습독재자인 김정은 정권이 갑자기 붕괴되어 북한 지도자가 한국과 합칠 것을 원 할경우, 한국은 북한 측에 주민투표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만약 북한주민이 투표한 결과, 남한과 통일을 원한다면 한국은 현행 헌법 제3조(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에 따라 북한은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북한 주민은 자동적으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날 이 오길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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