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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정신과 의지의 화신, 사카모토 료마 리더십
기자 : 관리자 날짜 : 2020-02-05 (수) 15:21
“크게 두들기면 큰 답이 나올 것이며, 작게 두들기면 작은 답을 얻을 것이다.” “인생(人生)은 일종의 연극(演劇)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생이 연극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연극의 무대는 타인이 설치해주는 반면, 인생의 무대는 자신이 직접 설치해야 한다. 그것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무대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결코 타인이 무대를 만들어주는 법은 없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역사상 가장 추앙하는 인물로 꼽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5~1867)가 한 말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통상 장수(將帥)라기 보다 상인이나 정치가로 평가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그를 ‘명장(名將)’으로 선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급 무사로서 당대의 손꼽히는 검술 실력자인데다 정식 일본 해군과 종합무역회사의 전신인 해군지원대(해원대·海援隊)를 창설, 휘하에 많은 추종자를 둔 준(準) 군사조직의 지도자였기때문이다. 특히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서지혜와 열정으로 일본이란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그것도 나라와 백성을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할만한 분수령(分水嶺)에서 두 번이나 피를흘리는 전쟁 대신, 대화와 타협으로 무혈 동맹과 혁명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상 어떤 유능한 명장보다도 탁월한 공적을 남겼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 하지 않았던가.

‘메이지 혁명(明治革命)’이라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서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쓰러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의 갈 길을 제시한 지사(志士)요 선각자(先覺者)였다.

료마는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일찌감치 해외에 눈을 돌려 일본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넓은 시야와 발빠른 행동력으로 근대 일본의 문(門)을 열어젖힌 료마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국민적인 ‘메시아’로 소환되는 특별한 존재이다.

료마라는 인물형은 고루하지 않다. 료마가 일본인을 사로잡은 것은 기존의 권위와 질서는 물론 개인의 욕망이나 사심에도 전혀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에서도 연유한다.

사츠마( )와 쵸슈(長州)의 연합, 이른바 ‘삿쵸( )동맹’을 성사시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계기를 마련한 것. 그러나 혁명 직전인 1867년 33세 생일날, 막부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교토(京都)에서 암살되었다.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짧은 삶 속에서 아무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낸 혁명가 료마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洞察力), 기발한 발상(發想), 유연한 사고(思考), 탁월한 협상력과 실행력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벼슬을 한 적이 없는 시골의 일개 무사였으나, 진취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대립하던 두 진영을 하나의 목표로 뭉치게 하고, 일본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했다.그를 통해 평범하고 배경이 없는 사람도 꿈과 비전이 있다면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된다.

도사번(土佐藩)에서 암살과 테러의 기운이 점점 짙어지던 1862년, 검객(劍客)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번을 탈출한다. 그가 탈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고지식한 사무라이의 사고방식을 갖고 에도(江戶)로 향했다는 것이다.

당시 번을 탈출한다는 것(탈번·脫藩)은 지금의 ‘탈북(脫北)’과 비슷한 상황이다.붙잡히면 대부분의 경우 사형(死刑)이 기다리고 있는 중범죄. 사형까지 감수한  검객 료마는에도에서 막부정권의 해군전문가로 활약중인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라는 인물을 암살하기로 결심한다.

페리 내항으로 혼란에 빠진 시대. 당시 존황양이파(尊皇攘夷派)였던 료마는 일본이 외국이 시키는대로 행동하고 있는 원인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가쓰가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

료마는 우여곡절 끝에 가쓰를 죽이고자 그의 집에 침입했으나 그가 그리고 있는 ‘새로운 일본’에 대한 이야기에 설복당한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오늘 밤 선생님을 반드시 죽이려고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속 좁고 편협했던 저의 생각을 반성했습니다. 저를 부디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원리주의자들의 단체인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 소속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던 사람이 적(敵)의 말을 경청하고 진심으로 따르는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후 자신이 소속된 도사 번을 이탈(탈번·脫藩)하여 나가사키, 고베 등의 항구도시를 떠돈다. 각지의 개화파들과 접촉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해운업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1864년 세운 고베 해군훈련소가 문을 닫게 되자, 1867년 가메야마 사추(龜山 社中)라는 해운 무역회사를 설립한다. 나중에 ‘가이엔타이(海援隊·해원대)’로 이름을 바꾼 이 회사는 사설(私設) 해군(海軍)의 역할도 맡았다. 

일본의 근대화, 서양화를 위해 짧은 일생을 오로지 내던진 료마의 삶은 이후 ‘해원대’를 발판으로 ‘삿초동맹’, ‘대정봉환’이라는 거사(巨事)들을 이루어내며 ‘메이지유신’의 초석(礎石)으로 우뚝 선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시발점이 되는 조슈(長州)-사쓰마( ) 두 개혁파 진영의 화합을 이끌어낸 사카모토 료마!사카모토 료마가 성년이 되던 시기는, 일본 역사에 격동이 몰려오던 시기였다.

1853년 7월 8일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다. 대포로 무장한 미국 군함(黑船·흑선)에 일본인들은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전쟁을 위협하던 페리 제독에 의해, 1854년 3월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들어선 이래 취해오던 쇄국(鎖國)정책을 포기하고 개국(開國)으로 선회하였다.이 사건은 당시 무력한 모습을 보인 도쿠가와 막부에 대해, 지방의 번(藩, 막부로부터 인정받은 영주가 다스리던 지역)과 무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천황이냐, 쇼군(막부의 수장)이냐의 권력 싸움은 개국이냐 쇄국이냐의 논쟁까지 더해져, 일본 사회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러한 갈등의 중심에 사쓰마 번( , 지금의 야마구치<山口>현)과 조슈 번(長州藩, 가고시마<鹿兒島>현)이 있었다.

두 번은 부국강병 등을 놓고 서로 경쟁하였으며, 사쓰마번이 천황의 조정과 쇼군의 막부가 합치자는 고부갓타이(公武合體)를 주장하자, 조슈번이 이를 반대하면서 서로 갈등을 겪었다. 사실, 조슈와 사쓰마 이들 웅번(雄藩)은 덴노(天皇) 지지, 바쿠후(幕府) 타도, 쇄국정책 지지(이후 개국으로 선회) 등의 같은 노선을 갖고 있었지만 이른바 ‘금문(禁門)의 변(變)<교토에서 조슈 번이 사쓰마 번 등 연합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패퇴>’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이때(1866년) 등장한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이다.결국 중재(仲裁)에 나선 료마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두 번이 동맹을 맺어 바쿠후를 멸망시키고 메이지 유신의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중재자 료마가 내건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양측으로부터 신뢰와 공감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료마는 ‘일본의 시스템을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구조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600년 넘게 지속되어 온 막부 시스템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선진적 구조를 짜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대업(大業)을 이루기 위해 양측간 분쟁을 조정하고 하나로 묶어 힘을 결집시키는 것이지상최대의 과제라고 판단, 양측 지도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마침내 ‘삿초동맹( )’을 성사시켰다.

료마 특유의 협상력, 개혁 의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실행력이 빛을 발한 것. 동맹 이후 이뤄진 조슈 정벌에 사쓰마는 가담하지 않았고, 막부는 쇼군(將軍)의 사망을 구실로 철수하게 된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이를 계기로 료마의 계획대로 막부에게 정권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당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이를 받아들여 천황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1867년)’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국가 통치권력이 천황에게 돌아가면서 에도 막부는 무너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 메이지(明治) 정부가 수립됐다.

료마는 자신의 스승이나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통합하여 ‘선중팔책(船中八策)’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일본의 비전을 내놓았다. 이는 후에 메이지 정부의 기본바탕 이념이 되었다.(신정부 강령 8책)대략적인 내용은 막부 등의 기존의 도움이 안되는 구조를 없애고, 의회(의원) 설치, 외국과의 정당한 조약, 해군대 창설 등 일본을 현대식으로 합리적이고 강하게 만드는 포괄적인 생각들이다. 료마는 다른 지사(志士)들과는 크게 다른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맞닥뜨려 관련된 사건 등 이슈 문제들을 하나씩 조정·해결하고 궤도를 수정해 나가면서 성장해 나가는게 일반적인데, 료마는 큰 비전 하나를 세워놓고 정면돌파한다.

좌절하거나 다른 길로 돌아갈 법도 한데, 그냥 권력을 좇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진정으로 자신들의 공동체인 일본을 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많은 일본인들의 평가다.

외세(外勢)의 군사·무역 압박을 받고 있던 당시 일본이 내전(內戰)을 통해 힘을 소모한다면 결국 좋은 건 서양세력 뿐이라는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료마는 어떠한 난관도 피하지 않았다.

료마 사후(자객에 의한 피살)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을 구심점으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중역들 주도하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단행된다. 그것은 일본 역사의 기적인 동시에 파란만장한 삶은 한편의 대하 드라마다.

가쓰 가이슈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사쓰마·조슈 연합, 대정봉환(大政奉還). 그 건 모두 료마 혼자서 한 일이야!”

료마가 존경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그토록 애를 써서 이뤄낸 열매를 정작 자신은 가지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뒤 그는 “자신은 관직 권좌에 맞지 않는다”며 모든 뒷 일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普作), 고토 소지로(後藤象次) 등 동료들에게 맡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글쎄, 세계를 상대로 하는 해원대라도 만들어볼까.”라고 답한 료마.

역사상 위업(偉業)을 이룬 영웅은 많지만, 료마처럼 자신이 손에 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 일은 보기 힘들다. 그러기에 일본인들은 ‘지난 천년 간 일본의 최고 정치지도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료마를 으뜸으로 꼽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뒤를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 오다 노부나가(細田信長·1534~1582),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1918~1993),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 도요토미 히데요시(吉·1536~1598) 등이 자리한다. (2010년 3월 아사히<朝日>신문 설문조사) 세상에 둘도 없는 큰 배포와 도량을 갖춘 거목(巨木)같은 사나이 료마! 순수한 청춘의 삶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정 올바른 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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