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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부자(父子) 패배시킨 ‘제2의 제갈량’ 명장(明將) 원숭환 리더십
기자 : 관리자 날짜 : 2020-11-30 (월) 17:22


류석호 강원대
외래교수 전 조선일보
취재본부장
변협 등록심사위원

1626년 1월, 후금(後金, 훗날 청 (淸))의 건국자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정예군 20만 명을 거느리고 현재 중 국의 랴오닝(遼寧省) 흥성(興城)에 있 는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했다. 명나 라 장수 원숭환(袁崇煥·1584~1630 년)이 산해관(山海關) 200리 앞에 있 는 영원성을 건설하고 ‘요서(遼西) 방어선’을 구축하는 바람에, 사실상 요동(遼東)을 거의 다 차지한 상태에서도 영토 를 요서까지 확장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 던 누르하치는 1626년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으 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때까지 수백 번의 전투 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을 만큼 신출귀몰의 평가를 얻던 영웅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에서 2,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며 물러난다. 영원 성의 명군(明軍)은 1만 명에 불과했다. 여기서 누 르하치는 생애 처음으로 뼈아픈 패배를 당한 것 이다. 원숭환은 복건(福建)에서 들여온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성곽에 배치해 밀집대형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누르하치군을 집중포격했다. 이 바람 에 후금군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 명군이 쏜 홍이포 포탄에 누르하치가 중상을 입 은 것이다.

“짐(朕)이 25세부터 군사 를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 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 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영원(寧遠)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했으니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겠 는가?”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결국 누르하치는 그 후유증으로 그해 8월 11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68세, 7개월 전인 1월 요하(遼河)를 건너 중국 본 토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영원성 공격에서 명나라 장수 원숭환에 대패한 영향이 컸다. 중국 에서는 원승환의 기적 같은 대승을 ‘영금지전(寧錦之戰)’ 또는 ‘영금대첩(寧錦大捷)’이라 부른다. 영원성의 명군을 지휘한 원숭환은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됐다. 병부상서 겸 계요( ) 총독으로 승진한 그는 “5년내에 전 요동을 회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누르하치와 원숭환이 영원성을 놓고 건곤일척 의 공방전을 벌인 ‘영원성 전투’가 명나라의 승리 로 끝남에 따라 명의 요동 방어선은 견고하게 유 지되었다. 비록 1641년 산해관(山海關) 외곽의 지 역이 모조리 2대 황제 홍타이지(皇太極·Abahai, 1592~1643)에게 함락당했지만, 청나라는 결코 오삼계(吳三桂)가 지키는 산해관을 자력으로 넘어오 지는 못했다. ‘이자성(李自成, 1606~1645)의 난 (亂)’으로 북경이 함락되어 숭정제(崇禎帝)가 자살 하고 명나라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욱일 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내달리던 누르하치에게 ‘영원성 전투’와 ‘원숭환’이란 존재는 패배의 수치 를 안긴 거대한 장벽이었다. 이 전투 10년 전, 요동(만주) 건주여진의 추장이 었던 누르하치는 여진의 여러 부락을 통합한 후 1616년 후금을 세웠다. 1618년 누르하치는 명(明) 이 자신들에게 가한 잘못들을 지적하는 ‘7대한(七大恨)’을 하늘에 고하고 명에 대한 전쟁을 일으켰 다. 1619년에는 사르후(薩爾滸·Sarhu)에서 명과 조선의 연합군 9만 명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1622년 누르하치는 무순·요양·심양을 탈취했다. 질풍노도(疾風怒濤) 같은 거칠 것 없는 승리가 영원성에서 정지된 것이다. 그리고 누르 하치의 한(恨)을 이어받은 그의 8번째 아들 홍타 이지 또한 원숭환에 의해 설욕(雪辱)은커녕 큰 곤 욕을 치른 것이다. 이듬해인 1627년, 조선에 대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끝내기가 무섭게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 끌고 요하를 건너 침공을 개시했다. 후금군은 대 릉하, 소릉하를 비롯한 여러 작은 요새들을 점령 하고는 금주성(錦州城)을 포위했다. 홍타이지로 서는 아버지 누르하치의 원수를 갚고 새로 즉위 한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영원성 공략 의 전초전(前哨戰)으로 임한 전투였지만, 여기서 홍타이지는 체면을 구긴다. 원숭환이 조정의 막 대한 지원을 받아 성벽을 강화하고, 믿을 수 있 는 동료 조솔교(趙率敎)가 지휘하는 3만의 병력 과 충분한 식량을 준비해 둔 데다 홍이포까지 대 량으로 배치된 금주성의 방어력은, 이 성을 간단 하게 점령할 수 있는 잔챙이 요새로 생각했던 홍 타이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14일간이나 금주성을 포위공격하고도 함락이 되지 않자 홍 타이지는 방향을 돌려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 을 공격한다. 하지만 금주성이 안 되는데, 영원 성이 될 턱이 없었다. 홍타이지는 영원성 공략에 실패하고 방향을 돌려 다시 금주성을 공략해 보지만 이 역시 실패 한다. 아버지 누르하치도, 아들 홍타이지도 중국 사를 조금만 읽어본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 빼 어난 인물들이다. 원숭환은 이런 영웅 부자(父子)들과 싸워서 승리한 희대의 공(功)을 세운 것 이다.

이에 명나라 말기의 문신(文臣) 원숭환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과도 많이 비교 되었다. 원숭환은 호(號)가 자여(自如), 자(字)가 원소(元素)로 광동성 출신이다. 1619년, 3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 해가 바로 ‘사르후 전투’ 에서 후금이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를 각개격파 로 물리친 해였다. 어쨌든 무과가 아니라 문과로 급제한 사실로 알 수 있듯이 그는 본래 문관이었다. 그는 평상시 에도 군사적 업무에 관해 토론하기를 즐긴 일종 의 군사 마니아(mania)였다. 실제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지나가 는 군사들이나 군졸들을 보면 항상 변방의 정세 를 물었고 친구와는 군사적인 일을 잠도 안 자고 토론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사 후순(侯恂)은 원숭환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쓸만하다’고 판단, 병부(兵部) 직방사주사 (職方司主事)로 임명하였다. 지방관에서 일약 중 앙관으로 변신시킨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래서 1622년부터 병주에 부임하였는데 혼자 위장을 하고 적의 진영을 직접 염탐하고 돌아와 말했 다. “제게 산해관을 맡겨 주십시오. 방비하겠습 니다.” 1627년까지 승진을 거듭한 원숭환은 이후 요 서 지방의 방어대책을 마련하여 북경과 산해관 의 안전을 지키는 최일선에서 활약하게 된다. 산 해관 방어를 위해 고심하던 원숭환은 영원(寧遠) 을 주목했다. 영원은 산해관에서 200리 정도 떨 어져 있는 ‘산해관의 현관(玄關)’이었다. 요동, 요 서 지역에서 육로로 산해관이나 북경(北京)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전략 요충지. 삼면 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동쪽으로는 발해만에 접 해 있어 방어에 용이했다. 더욱이 해안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바다에 각화도(覺華島)라는 섬이 자 리잡고 있어서 배후의 지원 기지로 활용할 수 있 었다. 원숭환은 ‘산해관을 지키려면 영원에 제대로 된 중진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명 조정의 관인들 가운데는 “산해관 바깥의 방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원숭환은 1623년 영원성 수축에 감독관으로 직접 참여, 조대수(祖大壽)와 만계(滿桂) 등을 지휘하여 담장 을 높이고 포대를 개수하는 등 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1624년 9월, 영원성의 수축 공사가 완료되었다. 영원성을 정비한 이후 원숭환이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명군의 화력을 증강시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홍이포(紅夷砲)였 다. 천계제는 서광계(徐光啓·1562∼1633)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르투갈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마카오(澳門)로부터 서양의 새로운 화포인 홍이 포 30문을 구입하여 북경의 도성과 산해관 등지 에 배치했다. 홍이포는 기존의 중국식 화포에 비 해 사정거리가 길었을 뿐 아니라 살상력이 월등 했다. 원숭환은 자신의 우군인 대학사 손승종(孫承宗)과 상의하여 산해관에 배치되어 있던 홍이포 11문을 영원성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성 밖이 아닌 성루 위로 옮겨 배치했다. 원숭환 은 병사들에게 홍이포를 조작하는 기술을 숙달 시키기 위해 손원화(孫元化) 등을 불러들였다. 훗 날 등래순무(登萊巡撫)로 활약했던 손원화는 당 시 손꼽히는 화기 전문가였으며 일찍부터 포르 투갈 기술자들에게 홍이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 웠다. 손원화는 영원성의 포병들을 훈련시켰다. 원숭환의 혜안과 손원화 등의 노력을 통해 영원 성의 방어태세는 일신되었다. 원숭환이 1626년 영원성에서 승리를 거두자 명의 조야는 감격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 후 연전연패했던 명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 었다. 하지만 ‘중화의 자존심’을 살린 이 같은 ‘민 족의 영웅’ 또한 1630년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전장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명 조정이 스스로 죽 였다. 후금의 반간계(反間計)와 명 조정의 당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나타난 결과였다. 재정과 군의 기강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명이 후금을 맞아 버틴 것은 문신 출신이지만 북방의 방어를 자임(自任)한 원숭환 덕분이었다. 성벽에 의존하는 ‘옹성전(甕城戰)’으로 만리장성과 산해 관을 굳게 지켰다.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 후금의 군대가 서쪽으로 수천km를 우회해 북경을 위협 하자 전방의 병력을 끌고 와 숭정제(崇禎帝)를 구 한 것도 원숭환의 군대였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올라가자 숭정제는 시기심에 눈이 멀어 명장 원 숭환을 능지처참했다. 홍타이지에게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원숭환 이었다. 원숭환은 1619년 문과로 급제했지만, 병서에 밝아 병부의 관리로 중용된 장군이었다. 원숭환은 ‘관외를 지켜야 관내 방어가 가능하다’ 는 논리를 펴며 산해관 동북방의 영원에 성을 쌓 았다. 그것이 누르하치가 난공불락의 요새로 꼽 은 영원성이다. 원숭환 덕분에 요하 일대는 명 나라가 우세한 형국이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1627년 즉위한 숭정제(崇禎帝, 의종)에게 부담 으로 다가왔다. 1629년 10월,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내몽골 로 우회해서 북경을 공략했다. 후금군은 북경 주 변도시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고 북경의 조정과 주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영원성과 산해관을 지키던 원숭환은 수도의 위기를 구하 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왔다.

원숭환의 부대는 11 월 중순 북경 성 밖에서 사투 끝에 후금군을 물 리쳤다. 원숭환이 인솔하는 9천 병사가 6시간에 걸쳐 후금군과 10차례 이상 싸워 결국 이들을 물 리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싸움은 원숭환이 이 끄는 명나라 군사들이 과거와 달리 얼마나 잘 훈 련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 군대는 단 한 번도 후금군과 평지에서 싸워 이겨보지 못했다. 아니 평지는커녕 수성전조차 못하고 지리멸렬하 다가 원숭환 등장 이후에야 겨우 제대로 된 수성 전을 보여주게 된다. 그런 약졸 명나라 군이, 천 리의 먼 길을 달려온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평지 에서 후금군을 무찔렀다. 이는 원숭환이 수성전 만이 아니라 야전에서도 충분히 유능하며 다수 의 적과 평지에서 싸우는 것도 회피하지 않을 정 도로 용감하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원숭환은 당시 명나라 군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평지에서의 전투를 회피하고 수성전에 전력을 집중하며, 보급에 만전을 기한 뒤 병력을 확실하 게 장악하고 끝까지 사기를 유지하는 등 명장이 라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잘 수행하였다. 그러나 원숭환에게 돌아온 것은 감사가 아니 라 원망과 증오였다. 황제와 조정, 백성들은 후 금군이 수도 주변까지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원숭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후금의 홍 타이지는 포로가 됐던 환관 양춘과 왕성덕을 통 해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 후금 군대를 관내로 끌어들였다’고 정보를 흘렸다. 반간계(反間計)였 다. 안 그래도 의종(숭정제)은 의심이 많은 성격 이었다. 원숭환은 이듬해 8월 처형됐다. 칼로 살을 1만 번 떠내는 극형이었다. 원숭환의 형제와 처자는 3,000리 밖의 황량한 땅으로 추방됐다. 원숭환 이 지키던 산해관에서 후금을 막던 병사들이 이 반했고 영원성은 함락됐다. 명나라 침공에 가장 큰 걸림돌인 원숭환을 숭정제의 손으로 제거한 것이 명이 패망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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