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없음
‘북방의 사자왕’ 구스타브 2세의 솔선수범 리더십
기자 : 관리자 날짜 : 2021-03-04 (목) 16:47



군제(軍制)개혁과 전략·전술 무기개발 이끈 근대전의 선구자 협업과 부하사랑 실천한 복지·전장의 선봉 선 용장(勇將)

러시아가 아직 ‘약소국’에 머물러 있던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북방의 패자’는 스웨덴이었다. 스웨 덴 역사에서 이른바 ‘제국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에, 스웨덴은 다른 유 럽 열강에 비하면 부족한 인구와 경 제력을 보충하고자 근대적 행정개혁 과 군사개혁에 매진했으며, 스칸디 나비아 반도와 발트해 전역에 세력을 떨쳤다. 구스타브 1세(Gustav I, 1496~1560)가 1523 년에 덴마크 세력을 몰아내고 새 왕조(바사·Vasa 왕조)를 세웠으며, 종교개혁을 주도해 가톨릭 교 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광산을 개발해 국가 발전 의 자금을 마련했다. 그의 뒤를 그의 아들과 손 자 네 사람이 차례로 이었다. 그리고 1611년에 즉위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 1594~1632) 왕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 련한다. 17세기를 스웨덴 역사상 ‘영광의 시대’로 활짝 연 것이다. 구스타브 2세는 유례없는 개혁으로 한 세대 만 에 스웨덴 국가를 근대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으며, 획기적인 군제개혁으로 스웨 덴군을 유럽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다. 그는 그 군 대로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를 차례로 무찌른 다 음 ‘30년 전쟁(1618~1648년 벌어진 가톨릭-프로테스탄트 간 종교전쟁)’ 에 참전해 비록 도중에 전사했지만 스웨덴이 리보니아(지금의 라트비아 와 에스토니아)의 지배를 확고히 하 고 북독일의 포메른과 브레멘, 비스 마르까지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했다. 구스타브 2세는 ‘북방의 사자(獅 子)’, ‘황금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용 맹한 왕이자, 뛰어난 군주였다. 특히 그의 업적 은 군사분야에서 빛났는데, 그의 군사개혁은 당 시 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훗날 프랑스제국의 나폴레옹 1세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을 만큼 혁신적이었다. 

그는 군사적인 분야에서 천재였 다. 사실상 ‘근대전’을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유럽 국가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국가 단위의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해 제대로 된 국가상비군을 조직했다. 또한,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아 당시 전술의 트 렌드였던 스페인식 테르시오(Tercio, 스페인 방 진 Spanish Square)를 포기하고 새로운 전술단 위 편제를 만들었다. 그는 연대급 편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단(旅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소규모 전술단위까지예비대를 편성해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유연하 게 대처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총신(銃身)을 줄 이고 횡렬(橫列)을 증가시킨 머스킷(Musket) 소 총의 비중을 들여 화력을 강화했는데, ‘마우리츠 의 선형진(線形陣)’과 달리 횡렬의 숫자를 10열 이 아닌 6열로 줄였고, 6열 횡대의 머스킷 병 중 3열이 빠르게 일제사격을 가해서 공격을 극대화 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3열 중 첫 번째 열은 무 릎을 꿇고 사격했고, 두 번째 열은 다리를 구부 려서, 세 번째 열은 서서 사격하도록 했다.) 그의 군사개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엔 ‘카라콜(Caracole, 스페인어로 달팽이)’ 기병전술(사격 위주로 싸우는 총기병대가 오와 열 마다 번갈아 교차 사격을 하는 전술)이 일반 화되어 있었는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과 의 전쟁에서 폴란드 기병대인 윙드 후사르에게 고전했던 스웨덴군은 기병의 파괴력을 올리기 위해 카라콜 전술을 포기하고 칼을 쓰고 돌파하 는 기병대 전술을 재도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병대의 변화. 당시 많은 유 럽 국가가 대포의 무게를 줄여서 경량화하는 것 에 초점을 맞췄는데, 스웨덴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형 대포의 경우, 파괴력이 강하고 사정거리가 길기는 하나, 재장전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화 약을 많이 소비(당시 질 좋은 화약은 초석[硝石]의 함량이 중요했으나, 이 초석 구입이 어려움)했을 뿐이다. 포를 쏘면 쏠수록 포신이 휘어지거나 갈 라질 수 밖에 없었기에 비효율적이었다. 이때 스웨덴은 4파운드에 불과한 작은 야전용 대포를 만들었는데, 기동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전방에서 보병대의 돌파를 보조하면서 이용할 수 있어 효율적이었다. 여기에 나무상자로 된 탄 약통을 본격 도입하면서 포탄의 보급을 손쉽게 했고, 장전속도 역시 빨라졌다. 이런 포병의 변 화는 포병전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끌었는데, 그는 보병과 기병의 전술을 개혁하고, 포병을 독 립된 부대로 운영하면서 이들 세 병과(兵科)를 유 기적으로 활용하는 이른바 ‘3병(兵) 협동전술’을 본격 도입했다. 전방에 위치한 머스킷(Musket) 총병(銃兵)이 3 개 열(列)씩 일제사격을 가하는 동안 후방의 포 병대가 엄호사격으로 적의 피해를 확대시키고, 양측에 위치한 기병대도 적 기병대를 제압하기 위해 돌진하면서 피스톨(권총)로 사격한 이후 칼 을 들고 돌격해 공격하는 전술이었다. 즉, 포병 과 기병, 보병 등이 삼박자를 이루며 총격전을 벌이는 형태가 갖춰진 것이다. 이러한 구스타브 2세의 포병전술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꾼 인 물이 프랑스제국의 나폴레옹 1세다. 스웨덴은 왜 이처럼 군사개혁에 열을 올렸을 까? 예나 이제나 스웨덴은 지리적으로 좋은 위 치에 있는 국가는 아니다. 

17세기 당시 스웨덴 은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 국이 압박했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덴마크가 버 티고 있었다.(당시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영토) 스웨덴은 넓은 영토를 갖고 있지만, 높은 위도인 까닭에 추운 날씨가 많다. 이 때문에 농지로 쓸 수 있는 곳이 적었고, 이는 인구에 결정적인 장 애 요인이었다. ‘30년 전쟁’이 발발했던 17세기 초 스웨덴의 인구는 150만 명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2,000만 명의 인구와 비옥하고 넓은 평야 를 바탕으로 당대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던 프랑스와 비교된다. 따라서 스웨덴은 폴란드나 리투 아니아, 또는 도이칠란트와 같은 남쪽 국가들로 나아가는 게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와 달리 국력이 지나치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스웨덴은 적은 병력으로 최대의 결실을 맺 기 위해 군대의 효율성과 자율성 부분에 많은 노력 을 기울였다. 군사개혁과 더불어 뛰어난 군사훈련 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이유다. 뭣보다 구스 타브 2세가 이끄는 스웨덴 군대는 사실상 스웨덴 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에 가까웠다. 인 구 150만 명에 불과한 나라에서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이런 나라들일수록 지휘관과 병사들 간 의 신뢰와 유대관계가 매우 중요한데, 지금 기 준으로 봐도 매우 위험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 었다.

 결국 이런 그의 적극적인 위험행동은 그 가 ‘30년 전쟁(1618~1648)’ 도중 벌어진 ‘뤼첸 (Lutzen) 전투’에서 만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 사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그는 무기 개발과 개 량에 많은 공을 들였다. 당시 유럽은 아직도 중 세기사들의 전통이 남아있었는데, 중장기병(重 裝騎兵)이 전투의 중심이었고, 보병과 포병은 기 병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게다가 보병들의 소총인 머스킷은 길고 무거 웠다. 공성용(攻城用) 무기였던 대포는 너무 크고 무거워 말 수십 마리가 끌어야 했다. 그는 군대 의 기동성과 화력 강화에 우선을 두었다. 머스킷 은 휴대가 간편하도록 짧고 가벼워졌다. 대포도 가벼워져 말 한 마리가 끌 수 있게 되었다. 기병 역시 무거운 갑옷을 벗고 피스톨과 칼로 무장하 여 가벼워졌다. 이처럼 새로운 무기체계를 갖춘 스웨덴군은 그 에 맞춰 새로운 편제를 구상했다. 이른바 ‘스웨 덴 대형’이 탄생한 것. 보병은 3~4개 대대로 구성 된 여단 단위로 편제했고, 각 여단에는 12문(門) 의 포(砲)가 배치되고 전투방식도 개선했다. 보병 대대는 6열 횡대를 이루어 전진하다 전투가 시작 되면 3열 횡대를 지어 적에게 일제사격을 가하였 다. 포병도 이러한 일제사격에 가담했다. 기병 역 시 포병의 지원을 받았다. 기병들이 적을 향해 돌 격하기 전 포격을 통해 적의 예봉을 꺾었다. 유럽 의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었던 보병·포병·기병 의 합동작전이 스웨덴 군에선 가능해진 것이다. 구스타브 2세의 군사 관련 업적 중 으뜸은 유 럽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국가 단위 징병제를 실시한 점이다. 이전까지는 대부분 국가위기상 황에서 민병대가 조직되는 것에 불과했었으며, 제대로 된 '국가상비군'으로서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스웨덴이 처음이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 전쟁 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근대전의 토대 가 구스타브 2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게 군사 전문가들의 통설이다. 전술적 분야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에서의 업적도 특출한데, 체계적 인 호구 조사에 기반한 지역별 징병 시스템을 활 용, 근대적 중앙 상비군 양성을 통해 지방에 대 한 중앙정부의 확실한 행정적 장악을 시도했다. 전술 외적인 국방행정에서도 혁신을 이뤘다. 근대적인 개념에 가까운 국민개병제와 예비군제 도, 상설직업군인제도를 최초로 실시해 현대 총 력전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이 전술적 혁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 다.

 당시 대부분의 군 편제가 용병(傭兵) 위주로구성되어 제대로 된 '상비군' 시스템이 뿌리내리 지 못하고 있었다. 용병은 급여가 주어지는 동안에만 아군일 뿐, 돈이 공급되지 않으면 배신하고 떠나거나 오히 려 도적질을 일삼는 등 폐해가 많았다. 그렇기에 구스타브 2세의 업적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이 다. 상비군 시스템을 체계화하여 용병 위주의 군 편제를 개선하고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개발, 유 럽 상비군의 개척자가 됨과 동시에 경량화된 보 병과 포병 전술의 개발 및 도입이라는 혁신을 일 궈냈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등 주요 국가의 군사 주력은 여전히 국제 용병대 세력이었고, 스 웨덴 수준의 치밀하고 체계적인 국가 내 지방행 정 장악과 군사 시스템 발전이란 두 마리 토끼를 스웨덴만큼 동시에 효율적으로 잡지 못했다. 당시의 스웨덴은 영토는 그럭저럭 넓지만 척 박한 기후와 토양 때문에 인구가 200만을 훨씬 밑도는 소국이었다. 구스타브 2세는 적은 인구 에서 비롯된 군의 숙련도와 규모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전국을 일정 규모의 행정단위로 편성해 각지의 군 간부들로 하여금 단위 지역별 백성들 에게 주기적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또한 군의 근간을 이루는 부사관과 장교단을 상설편제로 두어 언제든지 인구 대비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 할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그가 이끌던 스웨덴 군은 각국의 예상보다 훨씬 많고, 혁신적인 군대 를 전선에 투입하면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구스타브 2세는 군제 개혁뿐 아니라 군인들의 복지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1개 대대당 의사 한 명이 배치됐고, 야전병원의 유지를 위해 전쟁 포획물자의 10분의 1이 적립되었다. 당시에는 병사들에게 줄 돈이 체불되거나 미뤄지는 건 거 의 일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는데 구스타브 2세의 경우, 돈이 밀리면 보급품이라도 잘 챙겨 줬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병사들에게 잘 해줬는 지 전장(뤼첸 전투)에서 왕이 죽었을 때, 병사들 이 분노에 차서 적진으로 돌격을 감행, 왕이 전 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투를 이겼다. 뭣보다 그는 솔선수범하는 지휘관이었다. 그 는 병사들의 훈련을 직접 지도했다. 병사들과 함 께 총을 쏘고, 직접 참호를 파고, 요새를 구축했 다. 전투에 앞서 직접 지형 정찰에 나섰고, 전투 가 벌어지면 언제나 선봉에 서서 싸웠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1632년 4월 14일 레흐 (Lech) 전투 전날이었다. 지형 정찰에 나선 그는 경계를 서던 적군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쳤다. 적군이 “너희 왕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그 는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6일 뤼첸(Lutzen) 전투에 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병사들에 게 남겼다. “나의 용감한 형제들이여! 나는 내 피 와 생명을 바쳐 그대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연설 후 맨 앞에 서서 전투를 벌이던 그는 적 총 탄에 맞아 전사했다. 스웨덴이 최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구스타브 2세의 뛰어난 리 더십 덕분이다. 상비군과 용병들이 혼재한 상대 적으로 작은 규모의 병력으로도 이만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 앞장서 싸우고 솔선수 범을 보인 그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1632 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는 그렇게 37세의 젊 은 나이로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본사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96파크뷰타워 208호 (사)21c안보전략연구원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아 02284 / 발행인 : 박정하

정기간행물등록번호 :서울라10600 / 대표전화 : 02-6953-0031, 02-2278-5846
팩스 : 02-6953-0042, 02-784-2186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정하

군사저널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새소식

Copyright ⓒ군사저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