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명희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유리창에 비친다. 그녀는 커피잔을 들고 선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나 누는 중이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의식하는지 내 쪽을 흘끔거린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것 같자 입을 사려문다. 다른 사람들에게 짓는 표정과 내게 짓는 표정이 영 다르다. “남측 사람들 말은 영어가 많이 섞여서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많아요. 언어에 주체성이 없단 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깜파니아, 그루빠, 꽃제비, 그런 말은 주체적인가요?” 우리 측 참가자 한 사람이 지기 싫은지 대꾸한다. “우리는 아주 적단 말입니다.” “적은 게 없는 건 아니잖아요? 사회가 발 전하면 언어도 변화해요. 하도 빨리 변해서 신조어, 외국어 다 번역해서 쓸 틈이 없어 고스란히 언어생 활에 흡수되는 현상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 회의 안내장에 휴식시간을 ‘커피브레이크라고 써 놓았던데, 그것도 기리 설명하갔습니까? 언 어학자들 모임에 ’커피브레이크‘가 다 뭡니까?” 그녀는 끝끝내 지지 않기로 작정한 듯하다. “저기 구석 에 있는 교수 선생은 여기 대사관들에 철조망 친 것도 우리 사람들 때문에 쳤다고 한다니까니. 남쪽 사 람들은 왜 기리 우기길 잘하나요?” 기고만장이란 표현을 이럴 때 쓰나? 이젠 제 흠인 줄 모르고 광고까지 하고 있다. 저 자리에 있는 우 리 측 사람들은 철조망의 진실을 모를 수 있다. 그때 박 과장이 내 등을 툭 친다. “일단 회의는 진행해 야 되잖아. 가져온 돈이 부족하니 우리 개인카드로 은행에 가서 현금을 뽑아 오자. 비용이 많아 한도 초과일 테니까 네 것도 긁어야겠다. 북한 사람들 보기에 창피해 죽겠어.” “그렇게 밀려가면 결국 당하 고 만다구.” “대사관 사람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어. 이런 사소한 일 하나 해결 못 해주고. 불러냈다가 덧나기만 하고 말았네.” 회의 속개 시간이 가까워 오는지 류명희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회의장 입구로 발걸음을 옮긴다. 류 명희가 사람들과 섞여 우리 앞을 지나치면서 우리를 곁눈질한다. 회의장에 등장한 지배인 때문에 우리 측의 구차한 처지가 이젠 참가자 모두에게 상세히 알려졌을 것이다. 회의 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 근심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북한 측 참가자들은 근심이 더 클 것이다. 발표자 1인당 5백 달러씩 발표료 를 챙겨 가야 한다. 명 교수가 평양에 갔을 때 학자들의 생활 형편이 딱해서 주기로 했단다. 참가 사례 비조로 북한대표단 전체 몫으로 5천 달러를 더 달라고 했는데, 도저히 예산 항목을 맞출 수 없어서, 또 국민세금을 가지고 퍼 주는 짓을 한다는 비난이 두려워 그것만은 거절했다고 박 과장은 귀띔했다. 물주인 남측이 돈 문제로 호텔 측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명분이 약한 발표료 조차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할 만도 할 것이다. 그들에게 명 교수나 호텔 측의 몰상식한 처사가 알려져야 하는데, 우리 측의 준비 부족만 부각되는 것 같다. 상관이 봉변을 당한 것까지 겹쳐 박 과장은 마음이 더욱 쓰릴 것이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보면 울화가 비등점을 넘어섰으리라. 나는 커피숍에 앉아 규범분과 논문들을 살핀다. 분과별 토론을 하루 앞두고 있어서 점심 식사 후 빈 시간을 이용한 것이다. 역시 류명희의 논문이 깐깐하다. 우리 측과 다른 이응(ㅇ)의 자음배열순에 대한 이론 전개가 우리 측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마음에 든다. 가슴만 좀 열면 얼마나 좋을까? 에스프레소 의 쓴 맛에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누군가 테이블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고개를 드니 류명희가 서 있 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커피숍 안쪽에서 자기네 대표단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돌아보니 그 자 리가 비어 있다. “우리 이젠 토론을 결속해야지요?”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내 앞에 앉는다. “아, 토론 준비를 하고 있었군요. 방해된다면 일어나갔어요.” 나는 펼쳐진 자료집을 탁 덮는다. “류 선생도 규범 분과죠? 여기서 철조망이든 규범이든 끝장토론을 벌입시다.” “이제부터는 말이 되는 소릴 하자요.” 농 담조차 거칠게 받는다. 군대 물이 몸속에 꽉 밴 것 같다. “군대생활은 어디서 했어요?” 나는 비꼬듯이 묻는다. “전연지구에서.” 어깨를 바짝 세우며 대꾸한다. 그래, 어쩔래, 하는 투다. “전연지구면 휴전선? 휴전선 어디에요? “오성산.” “야아, 나는 철원에서 복무했는데.” 오성산이라면 내가 좀 안다. 철책근무 6개월 내내 그 산을 바라보며 지냈다. 눈앞을 가로막은 장막처 럼 답답하게 보이던 산이었다. 이 여자가 그 산에 있었다고? 내게 총부리를 겨누고서? “매일 오성산을 향해 오줌을 갈기며 살았어요.” 내가 덧붙이자, 그녀가 피식 웃는다. “몇 년도에?” “86년부터 87년 사 이 꼬박 6개월.” “내가 복무할 때였군요. 그때 난 고사포중대에서 복무했댔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곳에서 서로 총을 맞대고 있었다는 거네.” “나는 고사포로 하늘을 겨누고 있었다구요.” 적막에 휩싸인 그곳에서 밤낮없이 내 총구가 향해 있던, 누군지 알 수 없던 그때의 적을 코앞에 서 만난 셈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반가운 기분에 사로잡힌다. “토론 결속을 하자니까니 딴 소리 만…….” 그녀가 투덜댄다. “그러자니까요.” “또 다음으로 미뤄야갔어요.” “왜요?” “시계를 보라요?” 그 러고 보니 회의 시간이 임박했다. 그녀를 따라 나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교수 선생이 진 것으로 하자 요.” “이래저래 제대로 된 적을 만났는데 더 치열하게 판가름해봅시다.” 퍼붓는 비를 헤치며 군용 짚차 한 대가 호텔 마당으로 들어온다. 무개차여서 차에 탄 국방색 우비를 입은 사내 셋이 소총을 어깨에 받혀 든 모습이 빗속에 퍼진 물안개 속에서도 자세히 보인다. 휴식시간 을 맞아 로비로 몰려나온 회의 참가자들이 난데없는 군용 짚차의 등장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다. 짚차 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우리가 있는 건물 출입구 쪽으로 다가온다. 이런 살풍경이 도심 한복판 호텔에 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역시 중국답다고 나는 반쯤 수긍한다.

회의장 입장을 재촉하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회의를 속개할 시간이 지났다. 이 이상한 광경을 구경하 느라 로비에 남은 사람들이 적잖다. 아쉬움을 버리고 회의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 이 열리고 군복 사내들 셋이 내린다. 군모에서 물방울이 어깨 위로 뚝뚝 떨어진다. 방금 짚차를 타고 온 사내들이다.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적신다. 이자들이 이젠 막가자는 것일까? 가운데 선 군복 사내가 옆구리에서 서류철을 빼내 살피더니 박 과장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몸서리를 친다. 대학원생 통역이 박 과장보다 한 발 먼저 사내에게 다가간다. 박 과장을 따라 나도 사내들 곁으로 간 다. 가운데에 선 사내가 큰 소리로 지껄인다.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듯 당당한 어투다. 통역의 얼굴이 돌 연 새파랗게 질린다. 박 과장의 얼굴도 이미 굳었다. 회의장으로 들어서던 사람들이 우리 주위로 몰려 든다. 우리 측 참가자 한 사람이 그들을 회의장 안으로 몰아넣는다. 드디어 통역이 박 과장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이 분 말은 지금 우리 대학 대외사업처장과 호텔 총 경리를 모처로 데려다가 조사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임다.” 요동치던 심장의 박동에 서서히 브레이 크가 걸린다. “명 교수님과 호텔 지배인이 짜고 한국정부를 사기 친 사건에 대해서 조사를 하는 중이람 다. 과장님더러 협조해 달람다.” 그는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는 것 같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에 원 망이 서렸다. “어디서 나왔는지 물어 봐요.” “국가안전부에서 나왔담다.” 우리로 말하면 국가정보원? 이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너는 혹 아냐는 듯 박 과장은 나를, 나는 박 과장을 빤히 쳐다본다. 지배인의 무례한 행동까지 전해들은 대사관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까? 설명을 끝낸 사내가 박 과장에게 함께 가자는 손짓을 한다. 비로소 한숨이 터진다. 로비 바닥에 물방 울을 남기며 그들은 박 과장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회의장에 들어서자 막 자리에 앉은 북한 측 참가자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호텔비도 제대로 안 가져왔나?” “기래서 호텔에서 공안에 신 고했나?” 분과별 토론을 위해서 따로 정해진 회의실로 간다. 류명희가 대여섯 걸음 앞에서 가고 있다. 걸음을 빨리 하여 그녀를 따라잡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은 회랑을 그녀와 나란히 걷는다. 사방에서 폭포 가 쏟아지는 것 같은 장맛비 소리가 시끄럽다. 습한 바람까지 휘몰아친다. 회랑 안으로 뻗은 편백나무 의 잔가지들이 회랑 바닥에 우두둑우두둑 물방울을 떨어뜨린다. “회의가 제대로 되갔나요?” 뜻밖에 힘 이 빠진 목소리다. “별 걱정을 다하는군요.” “호텔에서 밥도 안 주갔다고 한다면서요? 회의 진행이 너 무 무계획적이야요.” 속사정을 말할 수 없어서 나는 헛웃음을 삼킨다. 명 교수가 마음을 돌이킬 시간을 주기 위해서 우리 측 대표단장은 호텔비 분쟁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지금까지 서울에 들어온 북측 사람들이 2만 명은 넘었을 거예요.” 나는 못 다한 말을 꺼낸다. “교수 선생은 영락없는 풍산개야요. 지고도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게 안타까와요.” “지금도 엄청 넘어온다니까 요. 한 개 군(郡) 인구는 넘었을 걸요.” 그녀가 나를 노골적으로 째려본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 것 같 다. 내가 당황해하는 사이 그녀가 휭 달아난다. 언제는 결속할 시간을 갖자고 찾아오기까지 하더니. 불화가 더 깊어진 것 같아 씁쓸하다. 시퍼런 번갯불이 회랑의 기둥과 편백나무 가지들을 하얗게 밝힌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천둥이 요란하다. 류명희가 보이지 않는다. 앞자리에서 두 번째 줄 가운데 그녀가 앉았던 테이블 위에는 명패만 덩그러 니 남아 있다. 회의의 마지막 순서인 종합토론 시간이라 그녀가 없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내 탓이나 되는 듯 꺼림칙하다. 회의가 끝날 시간이 가까워 오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이나 태도를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그럴 만한 일이 없다면 없고, 있다면 있는 것 같다. 남쪽 사람 열 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당해낼 것처럼 강한 척하더니 똥폼만 잡았다고 나는 속으로 그녀를 욕한다. 명 교수도 보이지 않는다. 국가안전부에서 그의 대학 간부까지 데려갔다. 그도 마땅히 끌려갔을 것이 다. 통쾌하지만 조선족 참가자들이나 북한 측 참가자들을 의식해 박 과장과 나는 내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박 과장이 돌아오고 명 교수가 사라진 것에 의아해하는 눈치다. 혹 지금쯤은 세세한 내막을 알 게 됐을까? 풀이 팍 죽은 대학원생 통역이 회의장에 여전히 남아 있다. 저놈은 왜 안 잡아가는지. 북한 측 참가자와 조선족 참가자들이 박 과장과 나를 보는 눈빛이 곱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자신들을 옹호 하는 입장에 서서 어느 정도 까발렸을 가능성이 있다. 설령 사실대로 말했더라도 회초리로 다스릴 일 에 총을 들이댔다고 비난할 것 같다. 실제 군복 사내들이 총을 들고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이 일을 입에 담지 않고 있다. 입에 담기 시작하면 대중심리가 작동하여 예기치 않는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우리 측 대표단장은 비난은 속으로만 하라고 했다. 서울에 가서도 명 교수의 비행을 떠벌려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나쁜 소문이 돌아 회의가 실패로 끝났다는 기록이 남 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무례하기 짝이 없던 지배인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우 리를 찾지 않고, 우리도 그를 찾을 일이 더는 없다. 종합토론이 끝난 뒤 자료를 챙겨 밖으로 나온다. 조선족 참가자인 성 교수가 나를 따라온다. 그를 떼 어놓으려고 걸음을 재촉한다. 그럴수록 그가 더 바짝 따라붙는다. “명희 선생이 왜 안 보이는 줄 암까?” “……?” “명 교수네 학교에 갔슴다.” “……?” “명 교수를 구명하러 명 교수네 대학 영도들을 만나러 간 검다.” 구명하러? 그렇다면 그녀가 명 교수의 비행을 이미 알았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그녀가 그 못 된 양반 편을 들겠다고 나섰다구? “조선측에서 명희 선생이 중국말을 잘한다고 명희 선생을 대표로 보냈담다.” 안 들어도 될 소릴 들은 것 같다. 같은 중국 사람 앞에서 명 교수를 욕할 수 없어 나는 끄응, 신음을 토해낸다. “명 교수에게 말 못할 어떤 사정이 있을 겜다.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님다.”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야,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참는다. “지금은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 거죠?” 나는 눈을 흘기고 묻는다. “철조망 이야 기야 그분들 입장을 고려해서 그리 말한 검다. 한국사람 입장에서야 그리 말하든 저리 말하든 뭐 어쩜 까?” 그가 멋쩍게 웃는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등짝을 찰싹 갈긴다. 회의 참가자들이 오찬을 하며 작별행사를 진행한다. 4박5일간의 회의가 모두 끝났다. 명 교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가 없었던 것처럼 그에 대해서 드러내놓고 말하는 이도 없다. 우리 측 대표단장이 앞으로 나가 송별사를 한다. 그때 오찬장 뒤쪽 출입문이 열리더니 박 과장이 나타난다. 아 침부터 안 보이던 그다. 빈자리를 찾는지 좌중을 돌아본다. 내가 살짝 손을 들어 올리자 연설에 방해되 지 않도록 허리를 바짝 수그리고 다가온다. 옆 의자를 바투 당겨 곁에 앉고는 쓴 웃음을 머금는다. “어디 갔었어?” “대사관에.” “왜?” “명 교수 사건을 무마시켜 달라 부탁하려고.” 농담 같지 않다. “무 슨 말이야?” “단장님이 가라니까 가야지.” “무슨 그런 개 같은 일이 있어? 단장님이 너무 보신주의에 빠 진 것 아냐? 차관이라도 한번 해보려고 그러는 거야? 그러니 그놈들이 우릴 맹물로 보는 거야.” “북한 단장이 어젯밤에 우리 단장님 룸으로 찾아왔더래.” “그래서?” “자기들이 이 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던 건 발표료 외에도 참가 사례비조로 5천 달러를 더 받기로 명 교수와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실토하더래. 지금 세월에 외국 나가 회의한다는 게 자기네 분수로는 안 맞는다는 거야. 5천 달러를 약속해 줘 겨우 나왔대. 그 돈으로 연구원들 생필품을 사다 주려고 한대. 회의 준비단계에서 명 교수한테 그 이야길 듣 고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비목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명 교수가 그 돈을 만들려고?” “바로 귀국해야 되니까 매일 회의 끝난 뒤 밤 시간에 가져갈 물건들을 미리 사 둬야 해서 그날 그날 현금이 필요했던가 봐. 그래서 카드로는 안 된다고 했던 거고.”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본다. “명 교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북한 단장이 사정하 더래.” “일이 터지기 전에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대?” “자존심 탓이었을까?” “5천 달러는 줬어?” “남 측 사정도 어려운 모양이라며 안 받겠다고 하더래.” “그래도 줘야지.” “그러려고.” 박수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북한 측 대표단장의 송별사까지 끝났다. 나는 손을 올려 돌연 가슴속에 고여 오는 먹먹함을 지그시 누른다. 중간쯤에 있는 식탁에 앉은 류명희가 보인다. 그리로 가 그녀 옆자 리에 끼어 앉는다. “교수 선생이 회의 진행을 성과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내내 애태우는 모습을 보았어 요. 수고했어요.” 첫날 만났을 때처럼 그녀의 표정이 밝다. “우리가 일을 계획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한 거지요.” 어제 회랑에서 그녀가 한 말을 빌어 대꾸한다. “호텔비 문제의 진상을 알았어요.” “철조망 문 제도?” 그녀가 살짝 눈을 찡그린다. 그러면서 빈 글라스에 포도주를 따라 내게 건넨다. 나도 그녀의 글 라스에 포도주를 채운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군대생활을 한 우리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군대 동료는 물론 아니 고…….” 그녀가 묻는다. “같은 땅을 밟았으니 동족? 아휴, 모르겠어요.” “닮은 발? 김동인의 소설 중에 발가락 어쩌구 하는 것 있지요? 나 그거 읽어 봤어요.” “발가락이 닮았네?” “맞아요. 우리 발가락을 대 보면 영락없이 닮았을 거야요. 80년대 중반에 철원 땅을 밟던 그 발가락 말이야요.” 우리는 뜬금없는 데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진짜 대 보라요.” 옆의 북한 측 참가자가 끼어든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 내어 웃는다. 내가 테이블 밑 그녀의 발에 내 발 한 쪽을 슬쩍 붙인다. 그런 다음 우리는 포도 주가 채워진 글라스를 들어 부딪친다. 쨍강! 소리가 경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