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행산
시인 / 언론인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올해 2015년은광복 70년이 되는 해이자,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조정과 고종황제를 윽박질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 조선을 사실상 식민지로 접수한 지 1백1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선대들이 나라를 잃고 망국민(亡國民)으로 살아온 당시의정황은 실로 처참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속국으로 만들어 지배한 36년 동안 조선인들은 한마디로 ‘노예’였다. 과거의 역사에서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데 이어1907년에는 고종이 일본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져 순종에게 양위를 해야 했고, 이어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을 당했다. 나라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외교권도 군대도 없는 빈껍데기 나라가 되어 질곡의 역사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으로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되었다.

이 무렵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와 소련의 극동 연해주로 이주해갔다.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가난과 굶주림을 벗어날 수 없었던조선의 많은 민초들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수탈까지 겹치자 어린자식들의 손을 이끌고 남부여대 주인 없는 기름진 황무지가 끝도없이 널려 있다는 만주와 연해주를 향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대대로 뿌리 내리고 오순도순 살아온 고향을 떠나 환경도 풍습도 낯선 남의 나라 땅연해주에 겨우 정착한 조선 유랑민들은 고된 현실 속에서도 그나마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굶주림과 혹한을 이겨내며 황무지와 밀림을 개간하고 언 땅을 일구어 겨우정착한 이들에게 1937년은 삶의 기반과 꿈이 한꺼번에 박살난 해였다.

소련 당국이 그해 9월부터 연해주의 고려인 십칠만여 명을 모두 쓸어 모아 육천 킬로나 떨어진 중앙아세아 동토의 황무지로 강제이주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강제이주가시작되기 한 달 전 이주에 저항할 가능성이있는 조선인 인텔리 이천팔백여 명이 일본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처형됐다. 가족들은 이들의 매장지조차 찾을 수 없었다. 소련은 미구에 소련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일본군은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진격해올 것이고, 그렇게되면 연해주의 현지 사정에 밝은 무려 십칠만여 명에 가까운 고려인들이 일본의 우군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이 같은 사태를 미연에 봉쇄하기 위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먼 오지로 이주시켜야 할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1937년 9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페르바야레츠카 역에서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일⋅이차로 나누어 가축 운반용 화물열차 총 백 스물네 량을 동원해 실시된 고려인 강제이주는 9월에 시작되어 11월 중순에야 완료됐다.

어렵게 마련한 농토와 세간을 모두 버린채 맨몸으로 창문도 없는 화물열차에 가축처럼 켜켜이 실려 한 달여 뒤 카자흐 자치공화국의 우슈토베와 크질오르다, 우즈벡 자치공화국 등지의 눈 덮인 황무지에 도착한고려인 십칠만여 명은 혹한의 동토에 헌 짐짝처럼 부려진 채 그대로 내팽개쳐졌다.

정착지에 도착하기까지 한 달여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열차 안에서 추위와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갔다. 시체들은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끌어내려져 그대로 눈밭에 버려졌다. 그 강제이주의 긴 여정 끝에 죽음의 땅에 내던져진 조선인들은 어린 아이들을 끌어안고 주저앉은 채 공포와 절망에 질려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이름 모를 이방인들이 눈 덮인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현지 여인들이 구운 빵을 식을세라 모포에덮어 나귀에 싣고 먼 길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 빵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조선 여인들은흐느꼈고, 현지인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함께 울었다. 강제이주 첫 해에 추위와 굶주림과 풍토병으로 이삼만 명이 죽었다.

고려인들 대부분은 가족의 처형과 강제이주를 겪으면서 나라 잃은 약소민족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소련 공산당정권이 하는 짓들을 지켜보면서 ‘이런것이 공산주의라면 공산주의야말로 새로운공포이자 엄청난 재앙’이라고 깨닫기 시작했고, 조선인 집단학살과 강제이주를 겪으면서 공산주의 정권의 비인도적⋅비인간적인 본색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우리 선대들이 소련에서 체험했던 볼세비키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끔찍한 비인도적⋅비인간적인 공포와재앙이 지금 한반도 북녘 김씨 왕국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볼셰비키 사회주의의 특성이 본디 그러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 인텔리들을 집단학살하면서 허위와 위선과 폭력혁명을 수단으로 하는 공산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던 셈이다.구덩이를 파고 갈대로 지붕을 엮어 그해 겨울을 난 조선인들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봄이 되자 맨손으로 황무지를 일구어 황망 중에 챙겨 온 씨앗들을 뿌렸다. 그리고 고려인 사회는 질긴생명력으로 서서히 재건되어 곳곳에 까레이스키 콜호즈(고려인 집단농장)를 조직, 중앙아세아 전 지역에 벼농사 기술을 보급했다.결국 고려인 콜호즈는 당시 소련을 방문한외국 귀빈들에게 맨 먼저 보여주는 소련의자랑거리가 됐다.

나라가 힘이 없고 위정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으로 우리 민족이 과거 약소민족으로서 겪어야 했던 비애와 고통은 지금역사의 교훈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하지만 이 같은 위상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숨 가쁘도록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갈 길이 멀다.

그야말로 ‘일모도원(日暮途遠) 지통재심(至痛在心) -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가슴에 맺힌 아픔이 있다’는 형국이다. 그렇다. 우리 한국인에겐 가슴에 맺힌 아픔이 아직 남아 있다. 그 아픔을 풀고 새롭게 나아가야할 길을 미래세대인 이 땅의 청년들이 일구며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