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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전략가, 영국 앨런비 장군 리더십
기자 : 관리자 날짜 : 2020-12-29 (화) 19:49




이번에 다룰 인물은 두 편의 유 명 전쟁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1917’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62 년 제작된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데 이비드 린 감독이 만든 수작(秀作)으 로, 아랍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고고 학자이자 아랍 게릴라부대 지휘관 출신 영국군 장교 ‘아라비아의 로렌 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 의 아랍에서의 활동을 그린 영화다. 오스만투르 크(터키)와의 팔레스타인 전쟁에 참전했던 아라 비아 민족운동의 원조자 T.E. 로렌스의 회고록 ‘지혜의 일곱 기둥’을 토대로 했다. 지난해 2월 개봉된 영화 ‘1917’은 샘 멘더스 감 독이 이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할아버지가 들려준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병사 2명의 이야기를 모티 브로 삼은 작품으로, 지난해 2월 제92회 아카데미 상(오스카상)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 생충’의 가장 강력한 작품상·감독상 경쟁작이었다. 둘 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배경인데, 앞의 것은 중동지역에서 영국연합군의 오스만투르크 제 국군을 물리치는 이야기이고, 뒤의 영화는 프랑 스 북부지방 아라스(Arras)에서 벌어진 영국연 합군과 독일제국과의 전투(일명 ‘비미[Vimy] 능 선 전투’)를 다루고 있다. 이 두 편의 전쟁영화에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영국군 장성 에드먼드 앨런비 (Edmund Henry Hynman Allenby, 1861~1936)이다. 먼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관 련 이야기. 1차대전 당시 영국 이집 트 원정군 소속의 군인 T.E. 로렌스 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독일군과 동맹군이 되 자 이들과의 중동지역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 기 위해 당시 아랍민족 중 파이잘 왕과의 연합, 나아가 전체 아랍민족들과의 연합을 이끌어 내 어 터키에 대항한 독립전쟁을 하게 만든 영국 중 동군 사령부의 밀명(密命)을 실행한다. 실제 영국 이집트 원정군 사령부의 터키 공격 작전을 전체적으로 계획하고 로렌스에게 아랍 동맹군을 위해 매월 20만 파운드(한화 3억 원)의 비용을 대준 인물이 이번 글의 주인공이다.

바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그의 상관(上官) 으로 등장한 영국 이집트 원정군 총사령관 ‘에드 먼드 앨런비 장군’이다. 어쨌든 이 터키와의 싸 움에서 로렌스가 일종의 연락장교로서 아랍측과 영국연합군 양측의 의사와 상황을 전달하고, 적 절한 행동을 조율하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 수있었던 것은 앨런비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 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영화 ‘1917’과 관련된 1차 세계대전 (1914~1918년) 중 ‘아라스(Arras) 전투’. 5년 에 걸친 대참사가 막바지로 향해 가던 1917년 4 월 9일부터 5월 16일까지 북부 프랑스 아라스 (Arras)에서 독일군과 영국·프랑스군이 각각 한 없이 이어진 참호 속에서 웅크리고 대치한 ‘2차 아라스 전투’는 끔찍한 ‘참호전(塹壕戰, Trench Warfare)’의 대명사로 불릴만하다. 더글러스 헤이그 최고 사령관 아래 에드먼드 앨 런비 장군의 영국 제3군과 헨리 호른 장군의 제1 군, 허버트 고프 장군이 이끄는 제5군이 독일제국 6군 및 2군과 요새화된 방어선에서 전투를 벌였다. 앨런비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 제3군이 아라스 를 공격하면 그 사이 호른이 이끄는 제1군과 고 프가 이끄는 제5군이 제3군을 엄호하며 아라스 인근을 공격해 독일군을 포위하는 게 영국군의 최종목표였다. 이때 고프가 이끄는 제5군은 아쉽 게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후퇴해야만 했지만, 호 른이 이끄는 제1군은 괄목할만한 승리를 거둔다. 호른이 지휘한 영국 제1군은 대부분이 캐나다 군단으로 이뤄진 부대로서 캐나다 군인들의 탁 월한 단결력으로 인해 목표로 했던 ‘비미 능선 (일명 145고지)’을 성공적으로 차지할 수가 있 었다. 캐나다 군단의 활약에 힘입어 주변 지역을 관측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 비미 능선을 장악 하자 앨런비가 지휘하는 제3군의 아라스 공격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었던 것. 앨런비가 이끄는 영국의 제3군이 과감한 선제 공격에 나서면서 시작된 ‘제2차 아라스 전투’는 독일과의 치열한 공방 끝에 마침내 영국군이 4.5 마일(약 7.2km)을 진격했다. 이는 참호전이 시 작된 이래 가장 넓게 확보한 것이었다. 1914년 의 1차 아라스 전투가 끝나고 독일군은 아라스 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3년 뒤 2차 아라스 전투 에서 영국연합군은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포 격을 가한 뒤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영국군은 7.2km를 진격했지만 영국군의 사상 자는 늘어만 갔고, 독일군의 방어태세는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영국군의 궁극적 목표는 프 랑스가 공세를 펼칠 때 독일군의 시선을 분산시 키고 잡아두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군 최고사 령관 더글러스 헤이그는 마음대로 대치상황을 물릴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 주공(主攻)을 맡은 프랑스군이 기대 이하의 판단 실수와 졸전으로 독일군에 전열을 정비하는 시간과 반격 기회를 주는 바람에 사실 상 초전에 독일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의미있 는 전과를 올린 아라스 전투에서의 영국연합군 의 활약은 빛을 잃었다. 이 때문에 한 달간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영 국연합군은 15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독일군 은 1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아라스 전투 얼마 후인 1917년 6월 27일, 앨런비 장군은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중동전선 은 터키군의 이른바 가자-비르쉐바 라인(GazaBeersheba line)으로 인해 동부로의 진격이 번 번이 좌절되었다. 제1, 2차 가자 전투는 아무런 소득 없이 피해만 늘어난 채로 끝났다. 앨런비는 이집트 원정군 산하의 두 군단인 21 군단과 20군단 이외에 추가적으로 전력을 강화하기로 하고 안작군(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이 주축이 된 사막산악 군단을 창설, 병사들 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데 시간을 들인다. 앨런비의 참모인 쳇우드(Chetwode) 장군은 이 전선의 돌파를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계획하는데, 비르쉐바 쪽으로 은밀히 진출·점령하고 무가르 (Mughar) 고지, 예루살렘 순으로 공격하기로 한다. 가장 중요한 목표인 비르쉐바는 예루살렘의 길을 따라 남쪽에 있는 오아시스로, 그 서쪽에 가자가 있으며 가자에서 비르쉐바에 이르는 방 어선은 팔레스타인의 평야지역을 이집트로부터 완전히 차단하였다.

비르쉐바는 4,600여 명의 수비군과 60정의 기관총, 그리고 28대의 야포가 방어를 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17개의 우물 에 폭약을 장치하여 연합군에게 점령될 경우 파 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경우 연합군은 예루 살렘으로 진출하는 동안 충분한 물을 공급받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작전은 무가르 고지 전투로 시작하여 앨런비 장군의 사막 산악군단이 야밤에 경장비와 최소 의 보급품과 수송 마차만을 가지고 30km의 사 막을 도보로 건너 비르쉐바까지 진출하고 부족 한 물은 이 오아시스를 차지해 보충하게 하는 내 용의 작전을 마련했다. 문제는 신속하게 우물이 파괴되기 전에 점령하는 것이었다. 1917년 10월 17일 무가르 고지 전투를 시작 으로 제3차 가자 전투가 시작되었으며, 20군단 과 사막 산악군단 약 8,000여 병력이 비르쉐바 공격에 참여하게 된다. 10월 31일 새벽 비르쉐 바에 진출, 제20군단의 포대로 본격 공세에 나선 영국연합군은 사막산악군단의 경기병(輕騎兵)여 단을 선두로 보병부대가 뒤를 따르는 일사불란 한 움직임으로 개활지를 넓게 산개하며 터키군 의 야포 사격을 무력화시켰다. 터키군은 그들이 전방 어딘가에서 말에서 내 려 공격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전혀 말에서 내리지 않고 전속력으로 돌격해 오는 경기병여 단으로 인해 당황하여 사격 조준시 설정한 거리 계를 재조정하지 못하였다. 터키군 사령부는 시 가지에서 방어하려고 하였으나 2열, 3열순으로 계속해서 연합군의 경기병여단이 쇄도하자 병사 들이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방어를 하지 못했다. 결국 급히 퇴각하면서 일부 우물들을 파괴하기 는 하지만 이때는 이미 대부분의 우물이 경기병여 단에게 확보되었고, 이로써 가장 중요한 시작점인 비르쉐바는 간단히 함락된 것이었다. 이 전투로 영국연합군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통로가 열리 게 되었으며 이 지역에서의 식수까지 확보되게 되 었다. 결국 가자-비르쉐바 라인을 돌파한 앨런비 장군은 그해 12월 9일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앨런비 장군은 1918년 4월 암만 점령이 실패 하자 다시 부대를 정비해 새로운 작전으로 터키 군을 공격하였고, 1918년 9월 17일 메기도 전투 를 벌여 승리한다. 고되지만 빠른 행군으로 그해 10월 1일 다마스쿠스를 공략했다. 그리고 이집 트 원정군은 10월 16일 홈스, 25일 알레포를 점 령했다. 결국 1918년 10월 30일 터키의 항복으 로 전역을 종결짓는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고기 분쇄기(Meat grinder)’ 로 불리는 서부전선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 관총과 포화로 진흙 속에 묻혀가면서 거의 미미 한 전과만을 얻었으나 앨런비 장군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당시로서는 짧은 기간에 사막을 가 로질러 터키군을 패퇴시킨 것으로 대영제국의 체면을 살리게 된다. 1919년 7월 영국군 원수에 오른 앨런비는 이 집트·수단 총독을 역임하며 1925년까지 중동 에 머물렀다. 이 무렵 오늘의 중동 지도가 그려 졌다.

팔레스타인은 비잔틴 제국이 사라센 제국 에게 빼앗긴 이후 ‘십자군 전쟁’으로 100여 년을 유럽인들이 차지했다가 다시 사라센인들의 차 지가 되었으며, 앨런비 장군의 공격으로 빼앗은 1918년부터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 지 영국의 지배로 남아있게 되었다. 앨런비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이스라엘의 하 이파 항구와 텔아비브에 그의 이름을 붙인 거리 가 생겼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요르 단강의 다리 하나에도 그의 이름을 새겨넣어 그 를 기리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중 한 명인 앨런비는 어 떤 인물일까. 그는 1861년 4월 23일 잉글랜드 노 팅엄셔 사우스웰 근처 브래컨허스트에서 태어나 1936년 5월 14일 런던에서 75세를 일기로 삶을 마 감했다. 앨런비 장군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 를 졸업하고, 1882년 이너스킬링(또는 에니스킬렌) 용기병대에 들어가면서 본격 군 생활을 시작했으 며, 영국 최후의 위대한 기병대 지도자로 꼽힌다. 보어전쟁(Boer War, 1899~1902) 영웅이자 1 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육군 원수에 오른 앨런 비 장군은 ‘황소’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며 전략적 식견이 당시 영국군 최고라고 칭송받았다. 특히 규율을 강조하여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럽 서부전선의 아라스 전투에서 분투해 명성을 떨 친 데 이어 중동의 오스만 제국 전선에서 예루살 렘 점령 및 메기도 전투에서 맹활약, 전세를 성 공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이처럼 빛나는 전공을 세우게 된 것은 그가 진 지전에서도 기병대와 다른 기동병력을 능숙하고 혁신적으로 이용한 덕분이었다. 앨런비는 특히 일선에서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야전군인 타입으 로, 당시 지지부진한 전황 때문에 축축 늘어지던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가 다녀가면 장병들의 사기와 부대 분위기가 이전보다 몰라보게 달라지곤 하여 ‘앨런비 효과 (Allenby effect)’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군사평론가들은 이 같은 배경으로 앨런비가 ‘인성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 다. 앨런비 총사령관은 아무리 욕심이 많은 부하 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최선 을 다해서 도와주는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는 매우 엄격한 지휘관이었지만 그럼에도 항상 부하들을 방문하여 그의 부하들 중 그를 존 경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앨런비 장군은 기 회 있을 때마다 부하들을 직접 방문하는 일이 잦 아 부하들은 그가 찾아가도 별로 예의를 갖추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군문을 나와 1919~25년 이집트 고등판무관 으로 재직할 때는 정치 소요(騷擾)기의 이집트를 엄격하지만 공정하게 이끌었고, 1922년 이집트 를 주권국가로 인정했다. 1919년 10월 메기도 (Megiddo)와 펠릭스토우(Felixstowe)의 앨런비 자작(子爵) 1세가 되었다. A.P. W. 웨이벌이 쓴 그의 전기(傳記)가 1946년에 나왔고, R.B. 가드 너가 쓴 전기도 1965년에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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